설교 본문

[디모데전서 6:11~16]

11.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12.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

13.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 앞과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선한 증언을 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내가 너를 명하노니

14.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

15.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16.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

 

너 하나님의 사람아(믿음으로 사는 삶)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라.”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며, 우리를 향해 “너 하나님의 사람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호칭이지요. 이 부름 속에는 하나님의 특별한 기름 부으심과 선택하심의 은혜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누구인지, 어떤 존재인지 아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너 하나님의 사람아”라고 말씀하시며 결국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너는 내 사람이다.” 할렐루야!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정체성입니다.

지난주 말씀에서도 나누었듯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믿음의 삶의 첫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본받는 삶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선택하신 놀라운 목적입니다 — 곧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인류 역사 속에 실제로 오신 사람이셨습니다. 우리와 같은 성정을 지닌 사람이었지만,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는 그분이 단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셨으며, 약속하신 대로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곧 하나님이심을 친히 증거하셨습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그 사건은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을 만한 확실한 증거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할렐루야! 그리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바로 그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이
우리 모두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위해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신 이유는, 그분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왜 새롭게 창조하셔야 했을까요? 아무리 사람의 힘으로 자신을 깨끗하게 하려 해도, 그 마음과 본성은 완전히 새로워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났기에, 아무리 제사를 드리고 죄 사함을 받아도 결국 아들의 형상을 본받을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은 분명했습니다. 옛 사람을 죽이고, 새로운 사람으로 창조하는 것. 그 방법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라고 선포하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 일을 이루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우리가 그 은혜를 믿을 때, 우리의 옛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창조되었습니다.

결국 이것이 무엇입니까?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자, 곧 아들의 형상과 같은 존재로 새롭게 빚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 하나님의 뜻이 바로 저와 여러분 안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약의 백성과는 다릅니다. 구약의 성도와 신약의 성도를 같은 기준으로 비교할 수 없습니다. 구약의 사람들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 속량의 역사가 일어나기 전의 사람들이지만 저와 여러분은 이미 2천 년 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 모든 약속이 성취된 후 새롭게 창조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두 번의 창조가 나옵니다. 첫 번째는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빚어 만드신 창조이고, 두 번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저와 여러분을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창조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 완성된 두 번째 창조입니다.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지난주에도 함께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두 번째로, 디모데전서 6장 12절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함께 나누고자 하는 주제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살아가야 할 두 번째 삶 —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삶입니다. 이것을 곧 믿음으로 사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우리 하나님의 사람들은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먼저 생각해볼 것이 있습니다. ‘믿음의 싸움을 싸우려면, 나는 무엇을 믿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알아야 진짜 믿음의 싸움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믿고 계십니까?

우리가 믿는 것은 단순한 종교적 신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의 구원자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출발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주인, 나의 주님으로 믿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심을 믿습니다. 우리의 인생을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며, 끝까지 돌보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예수님께서 공의로우신 심판자이심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알파요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그분은 시작이시며 동시에 끝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이 마지막 날에 영원한 심판의 왕으로 오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단지 현재의 구원만이 아니라, 장차 주어질 상급의 심판, 즉 믿는 자들에게 주어질 영광의 상급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분명히 압니다. 우리의 믿음의 여정은 끝이 있습니다. 그 끝은 바로 영원한 심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서는 날입니다. 그리고 믿는 자들에게는 그날이 두려움의 날이 아니라,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는 날이 될 것입니다.

그날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아, 부활체, 곧 영광의 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약속한 우리의 최종 목적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고 사셨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사흘 만에 부활의 영광의 몸으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또한 그 길을 따르게 됩니다. 예수님과 같은 형상, 부활의 몸으로 덧입는 것, 이것이 마지막 때에 우리에게 이루어질 일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약 부활이 없다면,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 수고하며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너와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이다.”

왜일까요? 부활이 없다면, 마지막에 영광의 부활에 참여하지 못한다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믿고, 무엇 때문에 이렇게 봉사하고,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겠습니까?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단호히 말합니다.
“만약 부활이 없다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헌신은 헛된 것이다. 그러나 보라!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셨다!”

그는 이렇게 외칩니다.
“지금 여기에도 많은 증인들이 있지 않느냐? 이곳에도, 저곳에도, 그곳에도 —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자들이 많지 않느냐? 그분의 부활과 승천을 직접 본 사람들이 이렇게 허다하지 않느냐? 내가 거짓을 말하느냐? 너희도 보지 않았느냐? 부활하신 예수님, 그리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바울은 그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언하며 이렇게 확신합니다.
“그분이 다시 오실 때, 우리 또한 그 부활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중요한 것입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이 우리의 구원자요 주님이심을 믿는 것이며, 또한 심판자로 오실 때 그분의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을 믿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이미 그리스도 예수께 붙잡힌 그것을 붙잡으려고 달려간다.”
그것이 바로 우리 믿음의 목표요, 우리가 바라보는 가장 큰 영광입니다.

그렇다면 부활의 몸은 어떤 몸일까요? 예전에 어떤 드라마에서는 천국에 가면 자신이 원하는 몸을 선택할 수 있다고 표현하더군요.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부활의 몸은 그보다 훨씬 영광스러운 몸입니다.

그 몸은 먹을 수도 있고, 느낄 수도 있지만, 지금의 몸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새로운 몸입니다. 썩지 않고, 약하지 않고, 영원히 빛나는 부활의 몸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질 마지막 영광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이 우리의 구원자이시며, 우리의 주님이시고, 우리 삶의 선한 목자이시며, 마지막에는 영원한 심판자로 오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날,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을 믿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무엇을 믿고 있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알아야 이 땅에서 믿음의 싸움을 싸울 수 있고, 그것을 알아야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깨닫게 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그러한 존재로 부르심을 받았고, 그러한 믿음 가운데 살아가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믿음의 삶을 살아낼 이 땅의 시간을 허락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보내심을 받아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내셨던 것처럼, 우리 또한 그분처럼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나타내는 자로 부름받았습니다. 성경은 우리를 가리켜 “세상의 빛으로 살아가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을 향해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 그 하나님의 선한 계획을 온전히 이루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훼방하는 일들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환란과 핍박, 압박과 두려움, 그리고 믿음의 삶을 포기하게 만드는 수많은 도전들이 우리를 끊임없이 시험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분명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서 살아가되, 예수님처럼 선한 영향력을 나타내는 삶을 살도록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는 하나님의 영광과 뜻을 이룰 수 있는 놀라운 잠재력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일을 위해 우리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빛은 숨겨두지 않습니다. 등경 위에 두어 모든 사람에게 비추게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의 빛으로 세우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에 꼭 필요한 존재다. 너희가 없으면 세상은 맛을 잃는다.”
이것이 바로 우리 삶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입니다.

우리는 그저 먹고사는 일에 매여 살라고 부르심을 받은 존재가 아닙니다. 그저 인생을 버텨내다 마치는 삶으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통해 세상 속에 선한 영향력을 흘려보내도록,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특별히 부르셨습니다.

그 계획의 크기와 분량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부르심의 영역과 사명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일이 반드시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일을 위해 우리를 준비시키셨고, 그 사명을 감당할 능력 또한 주셨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일을 방해하려는 세력도 존재합니다. 우리가 믿음의 길을 걸어갈 때, 수많은 문제와 도전이 닥칩니다. 그래서 믿음의 삶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래서 말합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그렇습니다. 믿음의 길에는 반드시 싸움이 따릅니다. 이 싸움은 단지 눈에 보이는 육신의 싸움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을 흔들고, 거짓된 정보로 속이며,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무너뜨리려는 사탄의 속임수와의 싸움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오셔서 사역을 처음 시작하실 때, 사단에게 세 가지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조차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미혹과 유혹, 그리고 방해를 받습니다. 우리를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하게 하고, 세상 일에 매이게 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싸움이 늘 존재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경고합니다.
베드로전서 5장 8절 말씀입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마귀는 “우는 사자”와 같다고 합니다. 우는 사자는 어떤 상태입니까? 성질이 나 있거나, 혹은 배가 고파 사냥할 준비가 된 사자를 말합니다. 즉, 사탄은 배고픈 사자처럼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목적은 단 하나입니다. 우리를 속이고, 눌러서, 움켜잡아 믿음에서 멀어지게 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못하게 하는 것. 이것이 마귀의 전략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믿음의 싸움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셨고, 구원받은 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도록 축복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대적, 마귀는 우리의 연약함을 파고들어
속이고 무너뜨리며, 결국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게 하려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가 삼킬 자를 찾는다”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또한 에베소서 6장 12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이 말씀은 우리가 싸우는 대상이 단순히 사람이나 눈에 보이는 세력이 아니라, 그 배후에서 역사하는 영적인 세력들임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주의 깊게 보면, 이 구절은 마귀의 세력에도 질서와 등급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통치자들”, “권세들”, “세상 주관자들”, “악의 영들” — 즉, 영적 세계에도 체계적인 구조가 있으며, 그들이 연합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공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가장 높은 단계가 통치자들, 그다음이 권세들, 그다음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의 싸움은 눈에 보이는 혈과 육의 문제가 아니라, 공중 권세 잡은 자들 —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과 그 무리들과의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들을 공중 권세 잡은 자들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다니엘서를 살펴보면 도움이 됩니다. 다니엘이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즉시 응답하셨지만 그 응답을 가지고 내려오는 천사가 21일이나 지체했습니다. 왜 21일이 걸렸을까요? 그것은 두 번째 하늘에서 악한 영들이 그 천사의 길을 가로막았기 때문입니다. 천사가 그 싸움을 치르며 내려오는 데에 21일이 걸린 것입니다.

성경은 하늘을 여러 단계로 구분해 설명합니다. 첫째는 우리가 눈으로 보는 하늘, 그다음은 공중 권세 잡은 자들이 다스리는 두 번째 하늘, 그리고 마지막은 셋째 하늘입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모르지만 하나님께 이끌려 셋째 하늘로 올라가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들을 보았다”라고 증언했습니다. 셋째 하늘은 우리가 이 땅의 삶을 마치면 돌아가게 될 새로운 장막, 우리의 영원한 집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셋째 하늘에 이르는 길을 두 번째 하늘, 곧 공중 권세 잡은 자들이 다스리는 영역이 가로막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악한 영들은 무엇을 합니까? 우리를 속이고, 억누르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어지게 하며, 결국 하나님의 뜻이 우리 삶에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따라서 우리 삶에 나타나는 많은 문제들 뒤에는 사실상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의 영향력이 존재합니다. 이것은 개인의 삶뿐 아니라 세상의 체제에도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와 같은 체제가 하나님의 뜻을 세우는 데 쓰이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일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훼방하는 일에 영향을 미치기도 합니다. 어둠의 세력들은 이러한 큰 구조와 체제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방해할 뿐 아니라, 각자의 삶 속에서도 미혹과 넘어짐을 일으키며 역사합니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정말 수많은 도전과 문제들이 있습니다. 인간의 삶 속에는 늘 해결해야 할 일들이 끊이지 않지요.

먼저 건강의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치유하시고 회복시키시며 온전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의 질병을 대신하여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가 나음을 얻게 되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분은 오늘도 우리를 회복하시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사단은 어떻습니까? 그는 속이고, 빼앗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자입니다. 그 공격은 질병의 형태로 오기도 하고, 때로는 재정 문제, 삶의 압박감 등 다양한 모습으로 찾아옵니다.

우리 모두 돈이 필요하잖아요. 솔직히 저도 “조금만 더 여유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부요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자녀인 우리도 하나님의 풍성함 안에 있습니다. 할렐루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 속에서 재정 문제는 우리를 자주 흔듭니다. 돈 문제가 생기면 근심과 걱정이 마음을 짓누르고, 때로는 그 문제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제약을 받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선한 영향력을 나타내야 하는데, 생활의 염려에 묶여버리는 것이죠.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부요함으로 이 문제를 이길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 — 바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건강, 재정, 관계, 사회적 도전 등 수많은 전쟁이 끊이지 않습니다. 때로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싸움을 걸어오기도 하고, 때로는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당하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이 믿음의 싸움의 한 부분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성경이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명령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믿음의 싸움은 단지 개인의 문제가 아닙니다. 결국은 복음을 전하고, 영혼을 구원하며, 모든 민족을 제자 삼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싸움입니다. 그리고 이 싸움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그날을 준비하는 싸움이기도 합니다. 그날,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칭찬을 듣기 위한 싸움이기도 하지요.

이 믿음의 싸움은 나 자신을 위한 것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전쟁입니다. 또한 각자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개인적인 싸움이기도 합니다.

성경에 보면, 우리가 잘 아는 다니엘이 있습니다. 그는 어린 나이에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갔지만,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와 믿음과 은혜로 탁월한 자로 세움받았습니다. 그가 하는 일마다 완벽했고, 흠잡을 데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탁월한 영을 부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탁월한 영을 주셨기 때문에 다니엘은 다리오 왕의 모든 행정 업무를 처리함에 있어 조금의 흠결도 없이 완벽하게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지혜와 성실함은 왕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그는 점점 더 높은 신임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바로 거기서 시작되었습니다. 왕의 사랑과 신임을 받게 되자, 그를 시기하고 질투하는 정치 지도자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저 다니엘 좀 보라고, 왕에게 너무 잘 보이잖아. 저 사람 때문에 우리 입지가 줄어들고 있잖아!”
그들은 다니엘을 어떻게든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의 삶을 샅샅이 조사했습니다. “혹시 뇌물을 받았나?” “거짓을 행했나?” 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단 하나의 흠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완벽하고, 너무나 정직했던 것입니다.

그러던 중, 그들은 다니엘의 삶에서 한 가지 특징을 발견했습니다. 다니엘은 하루에 세 번씩, 예루살렘을 향해 창문을 활짝 열고 하나님께 무릎 꿇고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것도 숨기지 않고, 모두가 볼 수 있게 공개적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그 모습을 보고 이렇게 속삭였습니다.
“그래, 저건 이용할 수 있겠어. 다니엘을 넘어뜨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의 신앙을 공격하는 것이야.”

그래서 그들은 교묘한 전략을 세웠습니다. 다리오 왕에게 나아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왕이시여, 특별한 명령을 내리시지요. 앞으로 3일 동안 왕 외에 다른 신이나 사람에게 절하거나 기도하는 자는 사자굴에 던져 넣는다는 조서를 세우십시오.”

왕은 깊이 생각하지 않고 말했습니다.
“좋다. 그렇게 하라.”
그리고 왕의 도장이 찍힌 법령이 공포되었습니다.

이 모든 음모의 목적은 명확했습니다. 바로 다니엘의 믿음을 무너뜨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때 다니엘은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을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다니엘 6장 10절)

다니엘은 왕의 명령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죽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만약 우리라면 어땠을까요? 아마 문을 닫고 조용히 기도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다니엘은 달랐습니다. 그는 깨달았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신앙 행위가 아니라 믿음의 싸움이구나.”
“지금은 믿음을 숨길 때가 아니라 드러낼 때구나.”

그래서 그는 문을 닫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활짝 열었습니다. 하루 세 번, 이전보다 더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그는 사람의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믿음을 지켰습니다.

결국 신하들은 자신들의 음모가 성공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됐다! 우리의 전략이 통했어!” 하며 곧장 왕에게 달려가 고발했습니다.

“왕이시여, 왕이시여! 왕께서 직접 공포하신 그 법령을 잊지 마소서. 그런데 지금 다니엘이 왕의 명령을 어기고, 창문을 열어놓은 채 자신의 하나님께 무릎 꿇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왕의 말씀대로라면, 그는 죽어야 합니다!”

그 말을 들은 다리오 왕은 깜짝 놀랐습니다. ‘다니엘이라니… 그가 그럴 줄은 알았지만, 설마 이렇게 될 줄이야…’ 왕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괴로워했습니다.

하지만 신하들은 계속해서 왕을 압박했습니다.
“왕이시여, 왕께서 친히 도장을 찍으셨지 않습니까? 이 법은 취소할 수 없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왕의 명을 지키소서!”

결국 왕은 어쩔 수 없이 다니엘을 사자굴에 넣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다니엘을 부르며 안타깝게 말했습니다.

“다니엘아, 나도 너를 구하고 싶으나 이 법은 돌이킬 수가 없구나. 그러나 네가 섬기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너를 지켜주시길 바란다.”

왕은 그 말을 남기고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오락도 멈추고, 금식하며 근심 속에 보냈습니다. 비록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의 마음에는 다니엘을 향한 걱정과 간절한 바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제발 다니엘을 살려주소서…”

그렇게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다리오 왕은 새벽이 밝자마자 사자굴로 달려갔습니다. 그는 숨이 차도록 뛰어가 굴 앞에 서서 외쳤습니다.

“다니엘아! 다니엘아! 네가 섬기는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셨느냐?”

그리고 놀라운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왕이시여, 걱정하지 마십시오! 나의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셔서 사자들의 입을 막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무사합니다.”

다리오 왕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그는 즉시 사람들에게 명령했습니다.

“어서 다니엘을 굴에서 올려라!”

다니엘은 조금의 상처도 없이 걸어 나왔습니다. 그를 보자 왕은 다니엘을 껴안으며 기쁨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명령했습니다.

“이 음모를 꾸민 자들을 모두 잡아라! 그들과 그 가족들을 사자굴에 던져라!”

그들이 굴에 떨어지기도 전에, 사자들이 달려들어 그들을 찢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왕이 심히 기뻐서 명하여 다니엘을 굴에서 올리라 함에 그들이 다니엘을 굴에서 올린 즉, 그의 몸이 조금도 상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자기의 하나님을 믿음이었더라.”
— 다니엘서 6장 23절

“그가 자기의 하나님을 믿음이었더라.” 이것이 바로 믿음의 승리입니다.

여러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다니엘은 자신의 믿음이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평소와 다름없이 창문을 열어놓고 하나님께 예배드렸습니다. 그는 진심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며, 자신의 믿음을 행동으로 증명했습니다. 그 결과, 결국 다니엘은 굶주린 사자들이 있는 사자굴로 던져졌습니다.

그 상황을 한번 떠올려 보십시오. 여러분이라면 사자굴 앞에 섰을 때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요? 사방이 어둡고, 사자들이 으르렁거리며 덮쳐오려는 그 순간 — 그 두려움이 얼마나 컸을까요?

저 같으면 너무 무서워서 사자굴에 들어가기 전부터 심장이 조여들고 숨이 막혔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다니엘은 달랐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는 확신과 담대함으로 그 자리에 섰습니다. 그는 고개를 숙이거나 두려움에 떨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눈을 똑바로 뜨고 사자들을 바라보며 이렇게 고백했을 것 같습니다.

“나의 하나님은 나와 함께하신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사람의 자세 아닙니까?

우리가 살아가며 믿음을 도전받는 상황에 처할 때, 우리도 다니엘처럼 믿음의 반응을 보여야 합니다. 그는 두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며 담대하게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태도가 하나님의 역사를 불러왔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천사가 내려와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다고요. 아마 그때 사자들이 다니엘을 보았을 때, 그의 뒤에 함께 계신 하나님의 영광을 본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감히 그를 해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담대하십시오! 믿음의 자리, 은혜의 자리에서 물러서지 말고, 문제와 두려움을 정면으로 대면하십시오. 피하지 마십시오. 움츠러들지 마십시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을 믿는다면, 상황 앞에서 도망하지 말고 믿음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다니엘의 반응을 묵상해 보십시오. 그는 위협 앞에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는 담대하게 행동했습니다. 그 믿음의 반응이 바로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킨 것입니다.

여호수아 1장 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네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강하고 담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로나 좌로나 흔들리지 말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우리 삶에도 믿음을 도전하는 수많은 상황이 있습니다. 질병의 문제, 재정의 어려움, 인간관계의 갈등 — 이 모든 것은 우리의 믿음을 흔들려는 공격일 수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눈을 똑바로 뜨고 그 문제를 믿음으로 대면하십시오. 말씀을 붙잡고, 믿음으로 선택하고, 믿음으로 행동하십시오. 이것이 바로 다니엘이 보여준 믿음의 태도이며,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원하시는 믿음의 모습입니다.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우리의 생각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로마서 8:6)

저도 경험해 보면, 정말 어려운 문제가 닥칠 때 인간적인 생각이 먼저 올라옵니다. 그럴 때면 영적인 시각보다 육신의 생각으로 돌아가기가 얼마나 쉬운지 모릅니다. 희한하게도, 좋은 생각은 잘 안 나고 안 되는 생각만 머릿속을 가득 채웁니다. “이건 안 될 거야. 망했어. 큰일 났어.” — 이런 생각들이 마음을 휘감아 버립니다.

게다가 문제는, 그런 생각이 입으로 나오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만날 때마다 “나 정말 큰일 났어… 이번엔 끝이야…” 이렇게 부정적인 말을 반복하며 육신의 생각이 말로 표현되는 것이죠. 결국 우리의 시선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믿음의 그림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눈앞의 현실과 불가능만을 바라보게 됩니다.

하지만 다니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형이 선포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 ‘죽음의 그림’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사자굴에 던져질 때도 “이제 끝이다”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구원과 승리를 믿는 믿음의 그림을 바라보았습니다.

우리의 생각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중요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을 낳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을 줍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싸움을 싸울 때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주시는 믿음의 그림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재정적으로 어렵거나, 심각한 도전에 직면한 분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현실의 부족함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의 부요함과 공급하심을 바라보십시오.

육체적으로 연약합니까? 그렇다면 성경 속 혈루증 여인의 이야기를 떠올려 보십시오.

그 여인은 12년 동안 피가 멈추지 않는 고통 속에 살았습니다. 의사에게 재산을 다 써도 아무 소용이 없었고, 사회적으로도, 종교적으로도 철저히 고립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마다 병이 나았다더라!”

그 여인은 믿음으로 생각했습니다.
“내가 비록 부정한 여인이지만, 예수님의 옷자락만이라도 만지면 나는 나을 수 있어.”

그 믿음이 그녀를 움직였습니다. 그녀는 겉옷을 두르고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나아가 마침내 예수님께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옷자락(옷 술)을 살짝 잡았습니다.

그 순간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예수님 안에 있던 치유의 능력이 흘러나와 그 여인을 완전히 고쳤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제자 베드로가 대답했죠.
“주님,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밀치는데요. 다들 부딪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아니다. 누군가 믿음으로 나를 만졌다.”

그 여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고백했습니다.
“주여, 제가 만졌습니다.”

그 순간,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할렐루야!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만졌지만, 믿음으로 만진 사람은 단 한 명, 그 여인이었습니다. 그 믿음이 예수님의 능력을 움직였고, 그 믿음이 치유를 일으켰습니다.

결국 우리가 믿음의 싸움을 싸울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을 생각하느냐, 무엇을 바라보느냐입니다. 현실의 그림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는 믿음의 그림을 바라볼 때, 우리도 다니엘처럼, 그리고 그 여인처럼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무엇을 바라보느냐 —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혹시 질병 가운데 있습니까? 끝이 보이지 않는 고통과 도전 속에 있습니까? 그렇다면 오늘 말씀 속 혈루증을 앓던 여인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 여인에게는 소망이 없었습니다. 의사들을 찾아다니며 가진 돈을 모두 허비했지만, 병은 나아지지 않았고 인생은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 나아간 사람마다 병이 낫더라.”

그때 그녀의 마음속에 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내가 그분의 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마태복음 9장 21절)

또 마가복음 5장 28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그녀는 그렇게 믿음으로 생각했고, 그 믿음대로 입으로 고백했으며, 결국 믿음대로 행동했습니다.

그녀는 군중 속을 헤치고 나아가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가 그분의 옷자락을 살짝 잡았습니다. 그 순간, 예수님 안에 있던 하나님의 능력이 그녀에게 흘러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즉시 병이 나았습니다. 할렐루야!

이것이 바로 믿음으로 바라보는 그림입니다. 절망의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는 눈, 그것이 믿음입니다.

오늘 우리 안에도 그 동일한 은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안에 계셨던 성령님이 지금 우리 안에도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치유하심, 회복하심, 그리고 능력이 바로 저와 여러분 안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무엇을 붙잡아야 합니까? 무엇을 말해야 합니까?

오늘 여러분이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 우리 안에 있다면, 선한 것을 붙잡으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을 붙잡으십시오. 그리고 다니엘처럼, 또 혈루증 여인처럼 믿음의 싸움을 끝까지 싸우십시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여러분 각자에게 주신 놀라운 뜻과 계획이 이 땅에서 반드시 나타나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단지 구원받는 데서 멈추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구원의 통로가 되어 다른 영혼들에게 생명과 회복을 흘려보내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저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입니다.

오늘 그 믿음을 붙잡으십시오. 그 믿음으로 살아가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선한 영향력을 세상에 나타내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나눔 질문

  1. “너 하나님의 사람아”라는 정체성

    • 요즘 내 선택과 말, 관계 속에서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정체성이 가장 잘 드러난 순간과 가장 약해진 순간은 언제였나요? 그 차이를 만든 요인은 무엇이었나요?

     

  2. 믿음의 선한 싸움—다니엘처럼 반응하기

    • 내가 지금 직면한 ‘믿음의 싸움’(건강·재정·관계·사역 등)은 무엇인가요? 그 상황에서 내가 취할 ‘다니엘식 반응’(숨지 않고, 하던 대로 하나님께 나아감)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이번 주 실천 한 가지를 정해 봅시다.

     

  3. 무엇을 바라보는가—믿음의 시선 전환

    • 최근 내 마음을 지배했던 ‘두려움의 그림’은 무엇이었나요? 이를 대체할 ‘말씀에 근거한 믿음의 그림’(붙잡을 성구, 고백할 문장)은 무엇인지 나누고, 함께 선포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