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본문
[사무엘상 17:41~49]
41.블레셋 사람이 방패 든 사람을 앞세우고 다윗에게로 점점 가까이 나아가니라
42.그 블레셋 사람이 둘러보다가 다윗을 보고 업신여기니 이는 그가 젊고 붉고 용모가 아름다움이라
43.블레셋 사람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나아왔느냐 하고 그의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하고 44.그 블레셋 사람이 또 다윗에게 이르되 내게로 오라 내가 네 살을 공중의 새들과 들짐승들에게 주리라 하는지라
45.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46.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47.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48.블레셋 사람이 일어나 다윗에게로 마주 가까이 올 때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향하여 빨리 달리며
49.손을 주머니에 넣어 돌을 가지고 물매로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의 이마에 박히니 땅에 엎드러지니라
더 이상 조롱받지 마십시오
먼저, 여러 모드라는 개념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리모콘의 모드 버튼을 누르면 냉방, 난방, 송풍 등 다양한 작동 방식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는 특정 상태나 작동 방식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조롱받지 마십시오’라는 제목처럼 어떤 모드, 즉 어떤 상태나 작동 방식을 취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진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조롱합니다. 특히 오늘날 교회에 대한 비난과 기독교인에 대한 편견은 심각한 수준입니다. 언론 또한 이러한 분위기를 부추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얼마나 많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왔는지 기억해야 합니다. 소수의 문제 있는 교회나 신앙인들의 모습을 가지고 모든 그리스도인을 폄하하는 것은 지양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편견에 직면하는 현실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세가 되면 자신을 따르는 자들이 더욱 미움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문제들을 마주할 때, ‘그리스도인이면서 왜 이런 어려움을 겪는가?’,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당신의 삶에 응답하지 않으시는가?’와 같은 조롱을 듣기도 합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요? 다음 시간에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함께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들려오는 소리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감정이 동요하고 마음이 무너지고 낙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지키는 올바른 자세를 갖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조롱을 받는 자리에서 조롱을 깨뜨리는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살펴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 특히 블레셋의 거인 골리앗으로부터 조롱을 당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골리앗은 키가 3미터 정도 되는 거구였고, 몸무게도 상당했으며, 큰 창을 들고 있었습니다. 누가 감히 그런 적장에게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 몇몇 용감한 병사들이 대적했지만, 골리앗의 칼과 창에 맥없이 무너졌습니다.
사무엘상 17장 8절부터 10절까지 골리앗의 조롱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골리앗이 나와서 이스라엘 전선을 마주 보고 고함을 질렀다. “너희는 어쩌자고 나와서 전열을 갖추었느냐? 나는 블레셋 사람이고, 너희는 사울의 종들이 아니냐. 너희는 내 앞에 나설 만한 사람을 하나 뽑아서 나에게 보내라. 내가 그를 쳐죽여 이기면 우리가 너희의 종이 되겠다. 그러나 내가 그를 쳐죽여 이기면 너희는 우리의 종이 되어서 우리를 섬겨야 한다.”
골리앗은 이스라엘 군대를 조롱하며, 자신에게 한 사람을 보내 싸우라고 요구했습니다. “나는 블레셋 사람이고, 너희는 사울의 종들”이라는 말은 “나는 블레셋 세상의 사람이고, 너희는 하나님의 종들”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하신다는 말씀을 들었지만, 그렇다면 한번 싸워 보자고 합니다. 내가 이기면 너희가 우리의 종이 되고, 내가 지면 우리가 너희의 종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를 조롱하며 싸움을 걸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에서, 마치 골리앗처럼 거대해 보이는 무언가가 우리를 압박하고 조롱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에 어떤 문제가 놓여 있는지, 그 문제가 여러분의 믿음과 신앙을 조롱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치유해 주셨다, 신성한 건강을 주셨다, 삶의 호의가 있다고, 구원의 은혜가 있다고, 부여된 은혜가 있다고, 풍성하게 채워주시고 안겨주시고 풍성케 하시는 은혜가 있다고 하지만, 왜 이렇게 힘든 상황인지 의문이 들 때가 있습니다. 정말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면, 오늘 사람들이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그 상황이, 그 문제가 지금 나를 조롱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그 문제 앞에서 어떤 마음과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까? 시편 42편 3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도대체 나의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조롱하는 말에 마음이 무너져 눈물이 주야로 음식이 되었다고 합니다. 어떤 문제가 너무나 크게 보여 감히 대적할 수 없을 정도로 보이지 않습니까? 마치 골리앗이 조롱하듯 그 문제가 여러분 앞에 서서 여러분을 조롱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상대방이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모욕적인 언행을 일삼고, 싸움을 걸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 즉 이스라엘 군대의 반응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에게는 냉방, 난방, 송풍 모드가 있는 것처럼 신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육신적인 모드와 영적인 모드로 나뉩니다.
오늘날 우리는 냉방을 켜고 생활합니다. 저는 28도 정도로 설정해 놓고 자지만, 어떤 분들은 20도까지 설정하고, 아이들은 방에 에어컨을 켜고 자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게 추운 환경에서 어떻게 잘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시원하게 해놓고 이불을 덮고 자는 모습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마치 얼어 죽을 것 같습니다.
이처럼 냉방 모드, 제습 모드가 있는 것처럼, 신앙적인 관점에서는 영적인 모드와 육신적인 모드로 나뉩니다. 이 문제 앞에서 이스라엘 군대는 육신적인 모드로 반응했습니다.
육신적인 모드란 무엇일까요? 눈에 보이는 현실이 압도적으로 커 보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감히 당해낼 수 없기에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조롱을 당해도 꼼짝하지 못하고, 못 들은 척 고개를 숙인 채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사무엘상 17장 11절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사울과 이스라엘 전 군은 그 블레셋 장수의 말을 듣고 매우 두려워하며 떨었다.”라는 말씀처럼, 그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현실을 직시하고 두려움에 떨며 육신적인 모드로 돌아섰기에, 두려움과 절망에 휩싸여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마치 머리가 하얘져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지난주에 제가 차에 치여 죽을 뻔한 경험이 있습니다. 2차선 도로에서 길을 건너 편의점에 가려고 했습니다. 주택가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노란색 어린이집 차량이 좌회전해 들어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운전자가 브레이크를 밟지 않고 저를 향해 계속 직진했습니다. 순간적으로 매우 놀랐지만, 침착하게 한쪽 손으로 차량 본네트를 짚고 점프하여 몸을 돌려 피했습니다. 건너편에 계시던 어르신께서 이 상황을 목격하시고 놀라 “하나님이 살려주셨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운전자에게 “거기서 멈춰서 들어오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만약 제가 그 순간 움츠러들었다면 큰 사고로 이어졌을 것입니다.
이후 아는 목사님께 이 일을 말씀드렸더니, “왜 그 자리에서 몇 바퀴 굴러서 쓰러져 있지 않았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순간적으로 몸을 피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휴대폰도 놓치고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놀랐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현실을 직면했을 때, 그 순간 당면한 문제들이 커 보이며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머리가 하얘지고 손과 발이 움직이지 않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는 마치 육체적인 모드에 갇힌 것과 같습니다.
본문을 읽어보았습니다. 이스라엘 전군은 그를 보자 겁에 질려 도망쳤습니다. 그들은 두려움에 떨기보다는 뒤돌아 도망간 것입니다.
그 조롱하는 소리는 “너희 하나님은 어디 계시느냐? 너희의 믿음은 어디 있느냐? 너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너희는 아무것도 아니다!”였습니다.
그 현실이 그렇게 크게 보이니 두려움에 떨다가 뒤돌아 도망가는 모습은 육신적인 모습입니다. 인간적으로만, 육신적으로 바라보니 문제가 커 보이고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 두려움과 절망이 찾아오고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머리가 하얘져서 멈춰 있거나 도망가는 방법밖에 없는 것입니다. 문제를 외면하는 것입니다. 바라보려고 하지 않고, 문제를 대면해서 봐야 하는데 보고 싶지 않아 외면하고 도망가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가 하면, 그들의 모두가 육신적인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관점에서 보면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골리앗의 크기, 골리앗이 가지고 있는 창의 크기, 외적인 모습만 바라보았기 때문에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말로 말씀드리면,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스라엘 군대는 누구의 군대입니까?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군대입니다. 그 전쟁은 누구의 전쟁입니까? 하나님께 있음을 안다면, 우리는 선택받은 창조주 하나님의 선택받은 자녀요, 백성이요, 그분의 군대임을 알고 있다면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육신적인 모습으로 반응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정체성을 잃어버렸습니다. 다 잃어버리게 되니 다 잊게 되었습니다. 골리앗 앞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리고성 앞에서, 내피림 앞에서 메뚜기와 같은 모습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육신적인 시각, 육신적인 관점은 문제를 과장하고 크게 보게 하고, 자기 자신을 축소시킵니다.
여러분, 육신적인 눈으로 육신적인 모습만을 보면 안 됩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보면 그 문제가 매우 크게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와 반대로 자신은 매우 작게 보이고 자신을 축소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문제에 대해 오직 다르게 반응했습니다.
사무엘상 17장 26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다윗이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이 블레셋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의 치욕을 제거하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대우를 하겠느냐 이 할례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누구이기에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
이 소년 다윗의 상태는 달랐습니다. 그는 외적인 크기를 본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무엇을 보았습니까? 살아계신 하나님의 군대의 입장에서, 선택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보았습니다. 함께하시는 하나님,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능력, 그리고 그분의 군대의 관점에서 보게 되니 다윗에게 골리앗은 커 보이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문제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저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의 치욕을 제거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대우를 하겠느냐”라고 말했습니다. 골리앗, 즉 그 문제를 없애는 사람에게 어떤 대우를 하겠느냐는 질문은 이미 다윗이 이겼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미 이긴 자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커 보이는 사람 앞에서 모두 떨고 있을 때 다윗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느냐”라고 말했습니다. 다윗은 그 문제보다 무엇을 바라보았습니까? 하나님을 먼저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이 할례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누구이기에 감히 살아계신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느냐”라고 말했습니다. 다윗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겁을 내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는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그는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하시는 은혜들을 늘 삶에서 경험하면서 살아갔습니다.
다윗은 목동이었습니다. 양을 돌보던 중 성경에 따르면 곰과 사자가 양들을 잡아먹으려 공격해 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우리는 때때로 사자와 같은 맹수와 싸워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두려움에 사로잡혀 도망도 못 갈 것입니다. 다리가 움직이지 않을 정도로 두려움에 휩싸이면 꿈에서조차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다윗은 소년이었지만 하나님을 찬양하고 높이며 하나님과 함께하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곰이나 사자가 양을 움켜쥐면 다윗은 쫓아가 곰이나 사자의 입을 벌려 양을 빼앗아 왔습니다.
이러한 용기와 담대함은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과 함께하시는 하나님, 자신을 지키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며 살아갔습니다. 곰과 사자를 이기고 빼앗긴 어린 양을 되찾아 오는 일들을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일로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블레셋 군대의 전쟁에서 골리앗을 마주했을 때, 골리앗을 사자나 곰과 같이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언제든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로 여겼습니다. 다윗은 “내가 사자와 곰을 쳤고 그 하나님이 지금도 나를 건지실 것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내가 곰하고도 싸워봤고 사자와도 싸워봤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셨고 마찬가지로 지금도 내가 저 블레셋의 장수와 싸워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실 것이다.”
다윗은 자신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고 그 은혜 안에서 기능했습니다. 시편에서 “하나님이 어디 계십니까?”라고 질문한 후 이어지는 구절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함께하셨던 하나님, 저를 도우셨던 하나님, 저에게 힘 주셨던 하나님, 저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내 영혼아 어찌하여 낙심하여 이렇게 주저앉아 있느냐,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있지 않느냐”라고 스스로에게 말하면서 다시금 일어서는 모습이 시편에 나와 있는 모습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듭나고,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고 그 선택받은 사랑으로 거듭났으며, 하나님의 성령이 내 안에 역사하셔서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라 일컬음을 받는 마귀와 사단을 이기신 그 권세가 내 안에 있고, 모든 상황을 바꿀 수 있는 그 능력이 내 안에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러한 모드로, 즉 영적인 모드로 반응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그 문제 앞에서 어떤 모드로 지금 반응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삶에 지금 보여지는 그 문제는 이 골리앗과 같은 문제, 그것이 상황, 환경, 질병이 되었든 어떤 것이든 간에, 내가 은혜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도록 조롱하는 요소들이 무엇입니까?
그 앞에서 여러분은 어떤 모드로 지금 대하고 있습니까?
벌벌 떨며 도망가는 이스라엘 군대와 같은 육신적인 모드로 그것을 반응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다윗처럼 영적인 모드로, 내가 누구인가를 알고 용기 있고 담대하게 믿음으로 오늘 반응하고 있습니까?
저와 여러분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의 정체성을 반드시 기억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 우리 잘 알고 외우고 암송하는 말씀입니다.
다시 한번 그 기본으로 돌아가서 한번 고백해 봅시다.
“그런즉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이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나는 새로운 창조물입니다. 새로운 창조물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과 의로움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자, 예수님 안에 거하셨던 하나님의 영이 동일하게 우리 안에 거하시고 임재해 계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한 자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이 그리스도 안의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났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하늘로부터 태어났다는 것은 그분의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과 그분이 가지고 계신 모든 것을 상속받아 소유한 자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새로운 창조물이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무엇으로 거듭났습니까? 썩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말씀과 영원한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그분의 본성과 의를 가진 채 거듭난 존재들 아닙니까?
우리 안에 주어진 그 놀라운 것이 밖으로 풀어져 나오기만 한다면 상황은 변화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육신적인 모습으로 반응한다면 상황은 바뀌지 않습니다.
다윗은 이미 이를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모드에 서서 이렇게 담대히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조롱을 당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결국 우리가 수치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문제나 상황의 어떤 것들이 지금 나를 조롱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수치 가운데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한 수치는 우리 자신의 정체성, 우리의 신분을 모를 때 발생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결코 조롱받을 자가 아닙니다. 결코 수치를 당할 자들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올바로 반응해야 합니다. 승리하는 믿음을 이제부터는 실행해야 합니다. 가만히 앉아 있지 말고 두려워 놀라서 물러서지 말고 다윗의 모습처럼 그것을 실행하는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 첫 번째는 항상 영적인 모드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 문제, 환경 속에서도 우리 삶이나 가족, 관계 속에서 마치 골리앗 꽃처럼 거대하게 느껴지는 무언가가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내 문제는 과연 무엇일까요? 내 삶에 관여된 모든 것은 나와 연결된 문제이며, 그 문제를 통해 은혜가 흘러가야 합니다.
무엇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육신적인 관점이나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만 생각하고 받아들이지 말고, 내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과 능력, 은혜 안에서 바라보고 생각해야 합니다.
영적인 모드가 되었다면, 다윗은 어떠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다윗은 영적인 모드로 반응한 후, 골리앗을 향해 어떻게 행동했을까요? 이제 직접적인 싸움을 시작합니다. 사울 왕은 다윗에게 싸움을 할 수 있겠냐고 물었지만, 다윗의 강하고 담대한 말과 하나님의 의지가 사울 왕에게도 공감되었던 것 같습니다. 사울 왕은 자신의 갑옷과 칼을 다윗에게 주었고, 다윗은 한번 입어 보았습니다. 하지만 자신에게 맞지 않는 옷이라고 생각하여 모두 벗어 던졌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자신이 늘 연습하고 사용했던 물맷돌과 돌멩이를 준비했습니다.
우리가 이 문제 앞에서 영적인 모드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각하고, 거기에 적용되는 말씀을 반드시 찾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말씀이 아닌, 자신에게 사용 가능한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다윗이 말씀을 취했듯이, 여러분도 하나님의 말씀을 취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승리를 위한 말씀을 준비해야 합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허탕을 치고 돌아와 그물을 정리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다가오셔서 “고기를 많이 잡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저는 “아니요, 허탕쳤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깊은 데 가서 한번 그물을 던져 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아이고 주님, 밤새도록 제가 고기를 잡아도 잡지 못했는데 지금 나가서 고기를 던져 봐야 없어요. 지금은 고기가 나올 때가 아닙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내 생각 말고 예수님 말씀하신 그 말씀에 의지해서 제가 한번 던져 보겠습니다. 그 말씀에 의지해서 그물을 던졌더니 그물이 찢어지도록 가득 차 버렸습니다. 저는 예수님께 달려가 그물을 건져 와서는 무릎 꿇고 바짝 아뢰었습니다.
“제가 죄인이었사옵니다. 나를 떠나소서. 저는 제 생각, 제 생각, 제가 생각하기에는 아닌 것 같았지만 그래도 말씀을 붙잡고 한번 가 보았더니 놀라운 일이 나타났습니다.” 베드로에게는 그 안에 과연 될까 하는 의심도 있었습니다. 믿음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제 생각은 이런데 그 말씀을 붙잡고 한번 행동으로 옮겼던 것입니다. 그러니 놀라운 결과가 나타나니 그냥 예수님 앞에 자복해서 제가 죄인으로 나를 떠나소서 했던 이 베드로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문제 앞에서, 상황 앞에서 대면하고 나아갈 때 그냥 있으면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모드로 생각하고 바라보았다면 반드시 그 말씀을 의지해서 그 말씀을 붙잡으십시오. 그 말씀을 붙잡고 그 말씀을 취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합니까? 예, 믿고 선포해야 합니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렇게 말하고 내가 반드시 승리할 것이고 내가 너를 쳐서 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것이라고 말했던 것처럼 오늘 그 상황에 대해서 말씀을 취했다면 이 말씀을 근거로 해서 믿고 고백하고 선포하고 말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네 번째로 드디어 행동하기를 시작합니다. 다윗은 골리앗을 향해서 이 물맷돌을 들리면서 빨리 달려갑니다.
말씀하신 대로 물매로 말씀을 던지거나 돌을 던지는 행위는 영화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어린아이가 천사를 보고 투수가 공을 던지면 천사가 공을 조종하여 홈런을 만드는 장면처럼 말입니다. 다윗의 이야기에서도 천사의 도움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하지만 단순히 천사에게 맡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경에는 12년 동안 혈루병으로 고통받던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수많은 의사에게 치료를 받았지만 나아지지 않았고, 12년 동안 돈도 잃고 사회생활도 할 수 없었습니다. 시집도 가지 못하고 여자로서 실패한 인생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던 중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예수님이 모든 죽은 자와 병든 자를 고치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의 옷깃만이라도 만지면 병이 나을 것이라고 결심합니다. 자신의 구원이 예수님께 있다는 것을 고백하고, 죽음을 각오한 결단을 합니다.
혈루병은 부정한 여인이기 때문에 터치하는 것만으로도 돌에 맞아 죽을 수 있는 죄였습니다. 당시 사회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우리 여성들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군중 속에 있는 예수님께 가기 위해서는 수많은 사람들을 접촉하며 비집고 들어가야 합니다. 만약 발각된다면 돌에 맞아 죽을 상황이지만, 그는 믿음으로 행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옷깃만 잡으면 된다는 간절한 믿음과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얼굴을 뒤덮고 사람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옷술을 살짝 잡아 지나갔습니다.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예수님께서 “누가 나를 만졌느냐”라고 물으셨고, 베드로가 “사람들이 많은데 무슨 말씀이십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니다. 누군가 나를 만졌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그 여인이 나서서 자신이 만졌다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처중을 설명하시며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시고 이제는 이 질병에서 자유롭게 될 것을 선포하셨습니다. 이 여인의 믿음의 행동이 예수님을 붙잡았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누가 나를 만졌느냐 내게로부터 능력이 나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예수님 안에 있던 치유의 능력이 이 여인의 믿음을 통해 그녀에게 흘러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행동입니다. 우리가 믿는다면 하나님 앞에서 성령의 이끄심과 은혜를 따라 믿음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행동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다윗은 말뿐이 아니라 밀매토를 믿음으로 계속해서 던졌고, 결국 이 골리앗의 이마에 정확하게 꽂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승리자의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는 칼을 뽑아 골리앗의 목을 베고 그 위에 서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영광을 선포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자입니다. 이웃을 섬기며 승리자의 자리에 서십시오. 우리는 승리자의 자리에 서도록 부름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끄러움이나 수치를 당하도록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걸작품이며, 영광 가운데 서게 하려고 부르신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골리앗은 동일하게 우리에게 소리칩니다. “네가 감히 나를 상대할 수 있느냐?” 무엇이 지금 당신을 도전하고 있습니까?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왕 같은 제사장이요, 하나님의 군대입니다. 우리는 조롱받을 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 상황을 변화시키고 반전시키는 믿음을 가진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어떤 문제가 되었든, 한번 돌아보십시오. 거기에 대해 당신이 지금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지, 육신적인 방식인지 영적인 방식인지 말입니다. 다시 한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당신이 누구인지, 당신의 정체성을 회복하십시오. 그리고 오늘 그러한 믿음의 결단으로 앞에 놓여진 문제를 대면하고 바라보며, 담대하게 다윗처럼 나아가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나눔을 위한 질문
1) 골리앗의 조롱과 위협이 오늘날 나의 삶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까?
(예: 경제적 문제, 사람들의 평가, 실패 경험 등)
2) 내가 문제를 만났을 때, 주로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육신적 모드인가요? (불안, 낙심, 도망 등)
영적인 모드인가요? (기도, 말씀, 선포 등)
3) ‘내가 누구인가’를 정확히 아는 것이 왜 중요한가요?
4) 다윗처럼 문제 앞에서 믿음으로 반응하고 행동했던 경험이 있나요?
5) 이번 주에 내가 말씀을 붙잡고 반응해야 할 문제나 상황은 우엇인가요?
적용해보기
1) 나의 문제(골리앗)를 적어보십시오.
2) 그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말씀 한 구절을 찾으십시오.
3) 매일 아침 그 말씀을 소리 내어 선포하십시오.
4) 두려움이 올 때, 다시 내 정체성을 선포하며 담대히 반응해 보십시오.
마무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리를 조롱하고 압도하려는 세상의 수많은 ‘골리앗’ 앞에 서 있습니다. 두려움에 떨며 물러섰던 이스라엘 군대처럼, 육신적인 모드로 반응하면 우리는 절망과 좌절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조롱받을 자가 아니라 승리할 자들입니다. 다윗이 그랬던 것처럼, ‘나는 누구인가’라는 영적인 정체성을 회복하고,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는 믿음의 모드로 반응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에 굳게 서서, 담대한 선포와 행동으로 나아갈 때, 모든 상황을 역전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조롱받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