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본문
[히브리서 4:12]
12.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잠언 6:2]
2.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잡히게 되었느니라
말! 말! 말!
오늘 하루 동안 많은 말씀을 나누셨을 것입니다. 또한, 수많은 정보를 접했을 것입니다. 특히 오늘날 우리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TV나 책 등을 통해 정보를 얻었지만, 오늘날에는 뉴스는 물론 SNS, 유튜브, 다음, 네이버 등 수많은 플랫폼에서 영상을 통해 방대한 정보가 쏟아져 나옵니다. 훌륭한 강의 또한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감히 접할 수 없었던 많은 정보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으며,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누구나 그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수많은 정보를 접하고 많은 말을 하지만, 그 모든 내용이 우리에게 도움이 되고 힘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말은 사람을 변화시키고 회복시키지만, 어떤 말은 사람을 죽이고 상처를 주며 소망과 믿음을 꺾기도 합니다.
우리가 돌아보면 삶을 변화시키고 회복시키는 말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6장 63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주신 말은 영이요 생명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은 하나님의 말씀에 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으며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습니다. 이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성경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단지 글자나 문장으로 이루어진 책이 아니라, 살아서 역사하는 힘과 능력을 지니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살아 있다는 것은 곧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는 능력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우리의 삶 속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힘을 드러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마주하는 성경의 본질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성경을 어떤 마음과 태도로 대하고 있는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단순히 기록된 책 정도로만 여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부르는 이 성경을 어떤 자세와 마음으로 대하고 있는지 진지하게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다고 선언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다는 증거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말씀이 결코 소멸되거나 사라지지 않고, 살아 있기 때문에 반드시 결과와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입니다. 이 진리는 인류의 역사 가운데 계속 증명되어 왔으며, 오늘도 우리 삶 속에서 묵상되고 체험되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은 오실 예수님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그 말씀대로 예수님께서는 2천 년 전에 이 땅에 오셨으며, 성경에 예언된 그대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은 무엇일까요? 그분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과 생명에 대해 사람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생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가 영생을 얻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었던 많은 사람들은 어려움과 이해할 수 없음 때문에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도 떠나려느냐?”라고 물으시자, 시몬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요한복음 6장 68절입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분명히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오직 예수님께만 영생을 주는 생명의 말씀이 있다는 사실을 그는 깨닫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는 생명 그 자체입니다. 그 말씀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며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은혜를 담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따라다녔습니다. 3천 명, 4천 명, 5천 명, 심지어는 7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물론 병을 고침받기 위해서였지만, 궁극적으로 그들은 예수님의 생명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였습니다. 그들은 배고픈 줄도 모르고 오랫동안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왜 그렇게 말씀에 집중했을까요? 바로 그 말씀이 살아 있는 생명을 주며, 자신들에게 참된 유익과 영생의 소망을 가져다준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예배드리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우리는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한 마음과 태도로 이 예배에 참석하셨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 여러분의 마음가짐은 어떠합니까? 때로는 단순히 형식적으로 예배를 드리기도 하지만, 그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우리는 언제나 영과 진리 안에서, 진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생명을 지니고 있기에, 우리는 오늘 이 자리에서 생명의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그 말씀은 우리를 살리고, 우리에게 새 힘을 주며, 결국 우리를 영생으로 이끄는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진리를 기억하고, 생명의 말씀을 겸손하고 진지한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의 예배는 바로 이 하나님의 말씀, 곧 하나님의 생명을 먹는 자리입니다. 이 생명이 우리에게 능력이 되어, 세상 속에서도 승리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놀라운 변화를 경험하게 되는 자리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드리는 진정한 예배입니다.
사람들은 왜 좋은 강의를 찾아볼까요? 유튜브에서 영상을 검색해 보고, 때로는 직접 강연 현장을 찾아가기도 합니다. 왜 굳이 시간을 내어 직강을 들으러 가는 걸까요? 요즘에는 강의로 유명해진 분들이 많고, 그분들의 말은 재미있을 뿐 아니라 실제로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됩니다. 혹시 여러분도 그런 강의를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종종 그런 분들이 방송에도 출연하지요.
그런데 그 강의를 듣다가 감동을 받아 직접 현장에 참석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혼자만 듣기 아쉬워 배우자나 친구를 데려오기도 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꼭 함께 가보자고 권하기도 합니다. 왜 그럴까요? 유튜브로도 충분히 들을 수 있는데, 왜 굳이 현장을 찾는 걸까요?
그 이유는, 현장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 자리에는 강의에 온전히 집중하는 사람들의 진지한 분위기와 함께, 말로 표현하기 힘든 특별한 에너지가 흐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강연자들도 그 자리에 직접 서서 메시지를 전하려 하는 것이지요.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온라인 예배도 가능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임을 알고 있기에, 직접 말씀 앞에 서는 자리를 더욱 소중히 여깁니다. 오늘도 우리는 이 생명의 말씀을 통해 새로운 양식을 얻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원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말씀을 경청한다면, 우리의 마음과 태도, 그리고 삶 전체가 달라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첫째,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선포된 말씀입니다. 그 말씀은 살아 있고, 생명이 있으며, 능력이 있습니다. 이사야서 55장 11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 (이사야 55:11)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결코 헛되이 돌아오지 않으며,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그가 보낸 일에 형통하게 된다고 선포합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은 목적이 있고, 반드시 그 목적을 이루며, 살아서 역사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으며, 그 생명의 말씀은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반드시 이루고야 만다는 진리를 우리가 깨닫고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들이 살아난 장면을 기억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이 모든 뼈들에게 대언하여 말하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날 것이다.” 에스겔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대언하자, 마른 뼈들이 살아나 큰 군대를 이루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생명력 있고 능력이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성경적 증거입니다. 죽은 것을 살리고, 없는 것을 있게 하며, 무기력한 것을 강하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드러난 것입니다.
이것은 곧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는 선언의 실제적인 성취이며, 오늘 우리도 이 살아 있는 말씀 앞에 서서 그 생명과 능력을 경험할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성경 전체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그것이 성취되어 가는 모든 과정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또한, 우리가 그 말씀을 묵상하고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경험하게 되는 놀라운 구원의 사건들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은 선포된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며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과 그 본질을 얼마나 이해하고, 또 그 말씀을 어떤 태도로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은 인식되어야 할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복음과 능력으로 이미 우리에게 선포되어 있으며, 우리가 그 말씀을 깨닫고 이해하며 개인적으로 받아들일 때,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레마의 말씀’이 됩니다. 다시 말해, 마음으로 믿고 인식된 하나님의 말씀은 더 이상 추상적인 개념이 아닌, 내 삶 속에 역사하는 실제적인 능력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생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생명이 우리의 삶 속에서 실제로 역사하고 나타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말씀을 이해하고, 깨닫고,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단순히 듣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믿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여야 비로소 그 말씀이 내 안에서 생명으로 작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능력이 단순한 지식이나 개념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말씀은 실제로 우리의 삶에 영향을 주고, 변화를 일으키며,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게 하는 살아 있는 능력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단지 과거에 선포된 말씀이 아니라, **오늘 내게 주시는 ‘오늘의 말씀’**이 되어야 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일을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을 줄 뿐만 아니라, 진리 자체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쉽게 말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사람의 생각과 마음이 바뀌는 것은 매우 어렵지만, 그것이 진리로 변화될 때 비로소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다양한 깨달음이 존재하지만, 잘못된 방향으로의 깨달음은 결국 잘못된 결과를 낳게 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 참으로 옳은가’를 아는 것입니다. 그 기준은 오직 진리,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가장 큰 능력 중 하나는, 진리를 통해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말씀은 우리의 왜곡된 생각, 감정, 행동을 비추어 드러내고, 거기서 벗어나 참된 자유로 이끄는 강력한 도구입니다. 로마서 8장 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이 말씀은 생각에는 두 가지 방향이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하나는 육신의 생각이고, 다른 하나는 영의 생각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수많은 생각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내 생각이 육신의 생각인지, 영의 생각인지를 분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수많은 문제와 상황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때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하느냐,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느냐에 따라 삶의 결과는 크게 달라집니다. 왜냐하면 육신의 사고방식은 결국 사망을 낳지만,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육신의 생각은 어떤 생각일까요? 쉽게 말하면, 육신이란 우리의 몸, 감각, 경험, 느낌을 기반으로 한 생각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느끼는 대로, 내가 보기에는, 내가 겪은 대로’ 생각하는 것이 바로 육신의 생각입니다.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다양한 감정을 느낍니다. 관계 속에서, 사건 속에서, 우리는 감정을 통해 판단하고 반응합니다. 하지만 만약 눈에 보이는 현실만을 기준으로 생각하고 반응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타날까요? 문제 앞에서 염려와 걱정이 먼저 밀려오고, 그 문제를 육신적으로만 해석하면 삶이 점점 더 절망적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결국, 낙심과 좌절, 우울감, 상실감으로 이어지게 되겠지요. 그런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삶은 점점 더 힘든 방향으로 흐르게 됩니다.
반대로 영의 생각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생각입니다. 영의 생각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복음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정체성과 위치를 깨닫게 해줍니다. 왜 이것이 중요할까요?
사람은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가에 따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어떤 문제 앞에서 내가 그 문제 아래에 있다면 문제는 너무 크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내가 문제보다 더 높은 자리에 서 있다면, 그 문제는 더 이상 커 보이지 않습니다.
영의 생각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내 위치와 신분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주어진 나의 새로운 정체성을 깨달을 때,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산 아래에서 바라보는 시선이 아니라, 산 위에서 바라보는 시선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바닥에 머물게 하지 않으시고, 산 위에 올려 놓으셨습니다. 우리를 빛이라고 부르시며, 등경 위에 두셨습니다. 등잔 밑에 두는 것이 아니라, 산 위에 두셔서 모든 사람에게 빛을 비추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진리의 말씀 위에 서서, 하나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죄와 사망, 종살이와 저주 아래에 있던 자리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속죄와 부활을 통해, 우리를 어둠 가운데서 끌어내시고 어디에 두셨습니까? 성경은 말씀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예수님과 함께 하늘의 자리에 올려놓으셨습니다. 성경은 이 자리를 시온산, 하늘의 예루살렘이라고도 부릅니다. 하나님은 단지 우리를 구원하신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자리에 살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 존재인가 하는 것입니다. 내 신분과 위치를 제대로 깨닫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아래에 있지 않고 위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산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모든 것이 달라 보입니다. 평지에서는 너무 커 보이던 문제가, 높은 곳에 올라가서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집니다.
예를 들어, 저는 가끔 히말라야 에베레스트 산 영상을 봅니다. 밑에서 보면 정말 어마어마한 산처럼 보이지만,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면 그 모습은 작고 평범하게 보일 뿐입니다.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래에서 바라보면 질병이든 고난이든 너무 크게 보입니다. 그러나 영의 눈으로, 복음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전혀 다르게 보입니다.
영의 생각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복음의 빛 안에서 나의 정체성과 신분을 깨닫는 것이며, 그 은혜의 자리에 서서 문제를 내려다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는 나음을 입었고, 지금도 치유하시는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이 진리를 알고, 우리의 자리를 정확히 인식한다면, 거대한 문제도 작게 보이게 됩니다.
우리 삶에서 마주하는 크고 작은 문제들이 때로는 산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위에서 바라보면, 그 문제는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대부분 육신의 감각과 감정으로 문제를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만을 근거로 판단하면, 염려와 두려움이 앞서고 결국 낙심에 빠지게 됩니다.
하지만 진리의 말씀은 우리에게 자유를 선포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절망의 자리에 머무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생명과 능력, 말씀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승리자로 부르심을 받았고, 하나님의 빛으로 이 땅에 태어났으며,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과 능력을 지닌 존재입니다.
우리는 저주 아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복과 형통, 능력이 역사하는 하나님의 걸작품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고, 그 위에 서서 삶을 바라볼 때, 진정한 변화가 시작됩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선포된 말씀을 내 것으로 취해야 합니다. 단순히 외우고 암송하고, 복음의 내용을 아는 데서 멈춰서는 안 됩니다. 말씀을 지식으로만 받아들이면 삶에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말씀을 믿음으로 붙잡고, 생명의 말씀으로 받아들여 삶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습니다. 그 말씀은 우리의 생각을 새롭게 하며, 그 새로운 생각이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킵니다. 그리고 변화된 마음은 우리 삶의 선택을 바꾸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삶 가운데 역사하는 방식입니다.
여러분, 꼭 기억하십시오. 사단은 우리의 생각을 흔들어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전략을 끊임없이 사용합니다. 우리의 생각이 흔들리면 마음이 흔들리고, 마음이 흔들리면 결국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아담과 하와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생명과 능력으로 충만한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단은 하와의 생각을 교묘하게 흔들기 시작했습니다. 하와가 선악과를 바라보게 하며, “이것을 먹으면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심어주었습니다. 그 순간, 하와는 선악과가 보암직하고 먹음직스러우며, 지혜롭게 할 것 같다는 생각에 사로잡혔고, 결국 그 열매를 따먹기로 결심했습니다. 바로 그때 사단은 하와를 유혹하여 죄에 빠지게 한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단은 우리 안에 ‘육신의 생각’을 계속해서 부추기며,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삶 가운데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우리의 생각이 진리에서 흔들릴 때, 결국 행동과 선택도 진리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아담과 하와는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의 약속을 잃었습니다. 이처럼 모든 선택의 책임은 결국 우리 각자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는 일이 매우 중요합니다.
잠언 4장 2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우리의 마음은 곧 생명의 근원이기에, 가장 소중히 지켜야 할 대상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많은 정보와 생각을 접합니다. 그 가운데 어떤 것을 받아들이고 선택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의 방향이 달라집니다. 세상의 소리에 흔들리기보다는,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을 때에만 바른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생각을 변화시키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온전하고 바른 열매를 맺게 합니다. 말씀은 단지 감정적인 위로를 넘어서, 우리를 견고하게 세우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는 능력입니다.
사도행전 20장 32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말씀은 우리를 예수님 안에 굳건히 세우며, 하나님께서 주신 놀라운 유업을 누리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의 기초를 말씀과 복음 위에 세워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유혹과 위협은 많지만, 가장 큰 유혹은 말씀을 놓치는 것이며, 가장 큰 위협은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과 천국의 유업을 잃는 것입니다. 천국에 간다는 것은 단지 죽음 이후의 장소 개념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부터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하며 누리는 삶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으로 태어날 때,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도 다양한 유혹과 도전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유혹은 단지 세상의 유혹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영원한 생명, 의의 자리로 인도하시는 은혜,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축복들이야말로 우리가 마주해야 할 참된 유혹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이제 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 이끄시는 은혜의 유혹에 사로잡혀야 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도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질병을 짊어지시고, 단지 치유뿐 아니라 신성한 건강을 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와 진노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저주의 반대는 바로 복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저주받은 자가 아닙니다.
“가계의 저주를 끊어야 한다”는 말에 사로잡히지 마십시오. 그리스도 예수 안에 태어나는 순간, 이미 저주는 끊어졌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놀라운 축복의 유업을 소유한 자들입니다. 할렐루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는 부족함이 없는 풍성한 은혜가 주어졌습니다.
한번 고백해 보십시오.
“나는 부족하지 않습니다. 나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순간, 하나님께서 그분의 생명과 능력, 그리고 모든 좋은 것을 우리 안에 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거듭날 때 성령님과 함께 우리 안에 임하셨습니다.
예수님 안에 계셨던 성령님, 수많은 사람들을 치유하고 자유케 하셨던 바로 그 성령님이 지금 저와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이 능력은 내 힘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그분의 능력입니다.
문제는 그 능력이 나타나는가, 나타나지 않는가의 차이일 뿐입니다.
우리는 이미 그것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 복음의 말씀을 더 깊이 이해하고 알아갈수록,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유업을 더 풍성히 누리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이 내 안에서 인식되고, 이해되고, 믿음으로 연결되는 자리입니다.
할렐루야!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말씀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오늘도 그 말씀을 듣고, 성령님의 조명하심과 은혜 가운데, 말씀이 실제로 내 삶의 것이 되는 자리까지 나아가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성경에는 우리가 잘 아는 탕자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이 이야기는 아버지와 두 아들, 즉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특히 둘째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유산을 미리 받아 떠나지만, 곧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맙니다. 그가 도박을 했는지, 요즘 사람들처럼 무리하게 코인 투자에 뛰어들었는지, 아니면 잘못된 사업에 손을 댔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많은 사람들이 돈을 잃는 가장 흔한 이유는 사기라는 점을 떠올리게 됩니다. 우리나라도 사기 피해가 적지 않죠. 요즘은 보이스피싱이 극성을 부리고 있어 경찰조차 속아 넘어갈 정도입니다. 개인 정보가 너무 쉽게 노출되어 있는 세상에서, 사람들의 신뢰를 악용한 범죄는 점점 더 교묘해지고 있습니다.
주식이나 코인 투자 실패, 혹은 사기 피해 등으로 큰 손해를 보는 이들이 많습니다. 둘째 아들이 정확히 어떤 이유로 모든 것을 잃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부유함을 지키기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돈을 벌기는 어렵지만, 쓰는 건 너무나 쉽습니다. 무분별한 소비는 결국 파산으로 이어지기 마련입니다.
둘째 아들은 모든 것을 잃고 먹을 것조차 없어 돼지 우리에서 돼지 사료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비참한 지경에 이릅니다. 그렇게 삶의 밑바닥까지 떨어졌을 때, 그는 비로소 아버지를 떠올립니다.
“아버지 집에는 먹을 것이 넘쳐나는 종들이 있는데, 나는 여기서 이 비참한 상황을 견디고 있다.”
그는 마음을 다잡고 결심합니다. ‘내가 아버지께로 돌아가야겠다.’
하지만 그 발걸음은 결코 가볍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당하게 유산을 요구하고 떠났던 자신이 이제는 빈털터리가 되어 돌아가야 한다는 수치는 말로 표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버지께 거절당하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용기를 내어, 부끄럽고 떨리는 마음으로 한 걸음씩 아버지를 향해 나아갑니다.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아버지가 그를 먼저 알아보고 달려와 그를 안아줍니다.
그는 다시 아들의 자리로 회복되고, 아버지는 그를 위해 잔치를 열어줍니다.
이 이야기는 단순한 비유가 아닙니다.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우리는 삶의 실패나 감정에 휘둘리기보다는, 그 상황을 통해 무엇을 깨달았는지 자문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진리를 다시 붙잡고, 믿음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의 삶은 완전히 변화될 수 있습니다.
잘못된 생각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선포된 말씀을 마음에 새기십시오.
그 말씀 안에서 깨달음을 얻고, 진리를 받아들일 때, 우리 삶은 변화되고 회복됩니다.
할렐루야!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언제든지 돌아갈 수 있으며, 아버지는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세 번째 말씀은 바로 ‘나의 말’입니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다시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 번째는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 곧 로고스입니다. 이는 기록된 성경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진 복음의 실체를 의미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며 능력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
하지만 이 말씀이 실제로 우리의 삶 속에서 역사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첫째는 그 말씀을 이해하고 믿으며 인식하는 것, 즉 레마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 말씀을 입술로 선포하는 것, 다시 말해 말씀이 ‘나의 말’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알고 믿는 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선포함으로써 역사하게 해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인 잠언 6장 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잡히게 되었느니라.”
이 말씀은 우리의 말 한마디가 삶을 얽히게도 하고, 자유롭게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흥미롭게도, 영화 올드보이는 바로 이 구절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합니다. 물론 영화의 내용은 기독교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지만, ‘말로 인해 얽히고 말로 인해 묶인다’는 메시지는 주목할 만합니다.
우리의 말은 삶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어떤 말은 우리를 결박하고 낙심하게 만들고, 어떤 말은 우리를 회복시키고 자유롭게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스스로를 돌아보며, 어떤 말로 인해 얽매여 있는지, 우리의 말이 지금의 삶을 어떻게 이끌고 있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진정한 변화는 말의 변화에서 시작됩니다.
야고보서도 혀의 권세와 말의 영향력에 대해 강조합니다. 바울 역시 고린도후서 4장 1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기록된 바,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도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었으므로 또한 말하노라.”
믿는다고 고백하면서 말하지 않는 것은 반쪽짜리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동의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 말씀이 실제로 삶 속에 역사하려면, 반드시 입술로 선포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이해하고 계십니까? 그리고 그 말씀을 얼마나 자주 여러분의 말로 표현하고 계십니까?
바울은 로마서 10장 9절에서 분명하게 말합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라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이 말씀처럼, 믿는 것을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 구원의 길입니다.
예를 들어, 병든 자는 “주께서 채찍에 맞으심으로 내가 나음을 받았습니다”라고 선포해야 합니다.
두려움이 찾아올 때는 시편 23편 4절의 말씀처럼 “주께서 나와 함께하십니다”라고 믿음으로 선포하십시오.
실패와 절망, 좌절의 상황에서도 빌립보서 4장 13절을 붙들고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라고 고백하십시오.
또한, 사무엘상 17장에 나오는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는 믿음의 선포가 얼마나 강력한지를 잘 보여줍니다.
다윗은 두려움에 빠진 군중들과 달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골리앗 앞에 담대히 나아갔습니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오지만,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너에게 나아간다. 여호와의 구원은 칼과 창에 있지 않음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다윗은 믿는 바를 선포함으로써 현실을 변화시킨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현실에 굴복할 때,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기반한 믿음으로 싸워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 살아 있는 말씀을 믿고, 인식하고, 받아들일 뿐 아니라, 입술로 선포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의 삶에 필요한 변화, 치유, 회복, 돌파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말씀을 붙들고 계십니까?
그 말씀이 지식으로만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까?
이제는 그 말씀을 믿음의 말씀으로 삼고, 입술로 선포하십시오.
그 말씀이 여러분의 삶을 새롭게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말씀이 여러분의 입에서 살아 움직이며, 삶의 방향을 믿음으로 조정해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할렐루야! 진리가 여러분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나눔을 위한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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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는 어떤 태도로 대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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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단순한 지식이나 정보로 다가올 때가 있었는지, 또는 생명력 있는 실제 말씀으로 경험한 순간이 있었는지 함께 나눠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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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나의 생각과 감정이 ‘육신의 생각’에 머물러 있었던 때는 언제였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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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선을 전환하려고 노력한 적이 있다면, 그 과정에서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도 함께 나눠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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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나는 어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선포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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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마음으로 믿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말씀을 입술로 고백하며 살아가는 실제적인 삶의 사례가 있는지 나눠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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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자의 이야기에서 둘째 아들이 ‘아버지께 돌아가기로 결심한 순간’이 오늘 나의 삶에 어떤 도전이 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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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하나님 앞에 다시 돌이켜야 할 부분이 있다면 무엇인지, 그리고 그 결단을 가로막는 감정이나 두려움은 무엇인지 함께 나눠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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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이 내 것이 되는 삶’은 어떤 모습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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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을 내 삶에 적용하고 살아낸 경험이 있다면 나누고, 앞으로 어떤 말씀을 붙들고 선포하며 살아가고 싶은지도 함께 나눠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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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능력이 있으며,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생명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단지 듣는 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입술로 선포함으로써 현실 가운데 역사하게 해야 합니다. 말씀은 우리의 생각과 마음, 그리고 삶의 방향을 바꾸는 힘을 지니고 있으며, 그 말씀이 내 것이 될 때 우리는 영적 자유와 회복, 능력의 삶을 경험하게 됩니다. 오늘도 우리는 말씀 앞에 서서, 그 말씀을 믿고 선포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과 승리를 누려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