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본문

[골로새서 2:1~5]

1.내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무릇 내 육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자들을 위하여 얼마나 힘쓰는지를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2.이는 그들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

3.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

4.내가 이것을 말함은 아무도 교묘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5.이는 내가 육신으로는 떠나 있으나 심령으로는 너희와 함께 있어 너희가 질서 있게 행함과 그리스도를 믿는 너희 믿음이 굳건한 것을 기쁘게 봄이라

 

삶을 변화시키는 지식이 되게 하십시오

복음은 기쁜 소식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소식이며, 그 은혜를 믿는 자들에게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복음 안에서 내적인 변화가 시작되고, 더 나아가 삶의 방향과 의미, 가치까지도 새롭게 변화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그 복음을 듣고, 믿고, 이제 그 은혜 안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 “삶을 변화시키는 지식이 되게 하십시오”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다”라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큰 은혜입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우리의 삶을 실제로 변화시키는 능력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단순히 듣는 데서 그치지 않고, 믿음을 세우는 말씀으로 받아들이며, 더 나아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지식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하나님의 말씀은 머리로만 아는 지식으로 머물러 버리곤 합니다. 우리는 성경의 내용, 사건, 예화, 그리고 예수님이 하신 일들을 많이 알고 있지만, 정작 그 말씀이 우리의 삶 속에서 능력으로 나타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전도를 하다 보면, 어떤 이들은 “성경을 여러 번 읽었습니다. 성경을 많이 공부했습니다. 잘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 속에서는 구원이나 변화가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생명이 있으며,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왜 그 말씀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지 못할까요? 그것은 말씀이 단순히 머릿속의 지식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지식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제가 자주 말씀드리듯이, 한 가지는 감각 지식입니다. 감각 지식은 우리의 오감을 통해 얻는 것으로, 보고 듣고 느끼고 경험하는 것을 통해 얻어집니다. 공부하고 연구하는 과정에서도 이 감각 지식이 작용합니다. 그러나 감각 지식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세계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에 보이지 않는 세계도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세계에서 얻을 수 있는 지식만으로는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흔히 과학적 지식이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과학은 어떨까요? 실제로 과학에서 완전히 검증된 지식은 약 30%에 불과합니다. 나머지 70%는 가설과 추론에 기초한 것입니다. 과학은 관찰과 실험을 통해 가설을 세우고, 그것을 검증하며 이론을 만들어 나갑니다. 그 결과를 우리는 지식이라고 부르지만, 결국 감각을 통해 얻는 지식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하나님에 관한 진리, 인류의 기원, 생명의 근원, 영혼의 존재와 본질 같은 문제는 감각 지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결국 인간은 단지 추론할 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때때로 영혼의 존재를 실험으로 증명하려고 시도합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 죽을 때 몸에서 빠져나가는 영혼의 무게가 21g이다”라는 이야기를 들어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임사 체험을 연구하며, 죽음 직전의 상태에서 영혼이 육체와 분리되는 현상을 과학적으로 규명하려고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시도들 역시 영혼의 실체를 완전히 설명하지는 못합니다.

결국 인간의 창조와 생명, 그리고 영혼에 관한 모든 것은 우리의 감각으로 얻는 지식으로는 결코 온전히 알 수 없는 영역입니다.

두 번째 지식을 우리는 계시 지식이라고 부릅니다. 계시 지식이란 곧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친히 나타내 주신 지식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이것을 성경이라고 합니다.

성경에는 인간의 창조와 세상의 마지막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생명의 근원, 생명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인간이 과학적으로 결코 접근할 수 없는 죄의 문제와 그 뿌리까지 모두 드러나 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것들을 알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신 성경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떻게 창조의 과정을 알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보여주셨고, 그것이 성경에 기록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첫째 날과 둘째 날의 창조, 사람을 만드시고 그에게 하나님의 기운을 불어넣어 살아 있는 영이 되게 하신 사건,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계시로 보여주셨기에 우리가 알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계시 지식입니다.

결국 가장 중요한 지식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경의 지식입니다. 이 지식은 우리의 삶을 이끌고 변화시키며, 참된 힘과 능력이 됩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성경에는 요셉이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요셉은 노예로 팔렸고,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눈앞의 현실만 보면 답답하고 소망조차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게다가 형들에게 배신당하고, 절망 속에 내던져진 인생처럼 보였습니다. 형들의 손에 우물에 던져졌을 때에도, 또 노예로 팔려갔을 때에도 어린 나이에 소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지요.

그러나 요셉은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영원한 지식, 곧 하나님께서 주시고 보여주신 은혜를 붙잡았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선택했고, 그 안에서 기쁨과 감사가 넘쳤습니다. 바로 그것이 그의 삶을 변화시키는 힘이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요셉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붙들었고, 그 은혜 안에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요셉이 종으로 끌려간 어린 나이에도 그의 삶을 바라보던 보디발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네가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한 것을 보니, 네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하신다. 그러므로 내 모든 것을 네게 맡기겠다.”

결국 요셉의 삶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며 동행하는 삶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를 사람들도 분명히 보았습니다. 보디발이, 그리고 주변 사람들이 요셉 안에 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떻게 주님과 동행하고 계십니까? 답답한 현실과 눈앞의 문제 속에서 감각적인 지식에만 의지하여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여러분 안에 역사하시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를 붙잡고, 그 안에서 기뻐하며 감사하고 계십니까?

성경은 말합니다. 기쁨은 외부 환경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라고. 변화 또한 우리 안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가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 은혜 안에서 기뻐하고 감사할 때, 그것이 우리 삶을 변화시키는 힘과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 말합니다. “내 삶이 먼저 변해야 내가 감사하지. 상황이 좋아져야 기뻐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성경은 다르게 말씀합니다. “아니다. 너희 안을 보라. 너희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다. 그 안에 하나님의 기쁨이 있다. 그러므로 기뻐하고 감사하라.”

하나님은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하노라. 네 안에 나의 모든 것을 두었으니 걱정하지 말라, 염려하지 말라.”

요셉 역시 눈에 보이는 현실이 아니라,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비전과 약속의 말씀을 붙잡았기 때문에 그 모든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원한 지식, 곧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은혜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현실 속에서 단지 눈에 보이고 느껴지는 감각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항상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말씀에 뿌리를 두고, 그 말씀을 붙잡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히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지식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말씀 묵상의 중요성입니다. 단순히 말씀을 이해하는 것과 그것을 삶에서 사용할 수 있는 지식으로 만드는 것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성경은 이 지식에 대해 네 가지 단어로 설명합니다.
첫째, 그노시스(gnosis)입니다. 이는 조사와 관찰을 통해 얻는 객관적인 지식을 의미하며, 흔히 과학적 지식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둘째, 기노스코(ginosko)입니다. 이것은 깨닫고 인식하는 단계를 가리킵니다.
셋째, 에이도(eido)입니다. 보고 경험하여 확신에 이르는 단계를 의미합니다.
넷째, 에피그노시스(epignosis)입니다. 이는 명확하고 지속적인 인식이며, 더 나아가 삶을 변화시키는 지식을 뜻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말할 때 사용되는 단어가 바로 이 에피그노시스입니다. 단순히 아는 수준을 넘어서, 삶을 변화시키는 확실한 지식에 이르라는 뜻입니다.

베드로후서 1장 3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과 경건에 필요한 모든 것을 이미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은혜는 단순히 주어진 것으로 끝나지 않고,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아 깨닫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안다”라는 단어가 바로 에피그노시스, 즉 명확하고 확실한 지식을 뜻합니다.

빌립보서 3장 8절에서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한 가치라고 선포합니다. 그는 그 지식을 얻기 위해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심지어 배설물로 여긴다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을 아는 정확한 지식, 에피그노시스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골로새서 2장 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그들로 마음의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

예수님을 안다는 것, 그것이 바로 복음의 핵심입니다. 3절은 계속해서 말합니다.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

그리스도 안에는 모든 것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안에는 하나님의 모든 것이 충만하게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에게 그것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의 구속이라는 위대한 일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에 관한 명확한 지식이 우리를 살게 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만세 전부터 감추어졌던 비밀, 그 은혜의 풍성함을 너희가 알기를 원한다. 그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이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그리스도 안에는 모든 보화와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바로 우리 안에 계십니다.

에베소서 4장 13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여기서도 “아는 일”이라는 단어가 에피그노시스입니다.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정확하고 지속적인 인식이며 삶을 변화시키는 지식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읽고 복음을 알고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더라도, 그것이 머리로 이해하는 데서만 멈춘다면 결코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예수님에 관한 정확한 지식, 곧 사용할 수 있는 말씀의 지식, 그것이 바로 에피그노시스입니다.

성경에 보면 사무엘 선지자가 등장합니다. 사무엘은 처음에 아주 어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그 음성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음성을 듣고는 누구에게 찾아갔습니까? 바로 엘리 제사장에게 가서 물었습니다.
“저를 부르셨나요?”

그때 엘리 제사장이 가르쳐줍니다.
“다시 음성이 들리거든 이렇게 말하라. ‘주여, 종이 듣겠나이다. 말씀하옵소서.’”

그 이후로 사무엘은 점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리로 나아갔고, 결국 이스라엘의 선지자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의 초기에 우리는 사무엘처럼 누군가의 가르침을 통해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하신다.”라는 사실을 듣습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실 때는 그 음성을 분별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배우고, 훈련받고, 말씀을 가까이하면서 점차 하나님과의 일대일 관계가 형성됩니다. 그렇게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고, 이해하고, 하나님을 아는 자리로 나아가게 됩니다. 결국 사무엘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사명자로 세워지게 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단순한 이해 단계를 넘어서, 명확한 지식(에피그노시스)으로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순히 복음을 듣고 예수님에 대해 아는 수준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그 상태로는 성숙하거나 성장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말씀이 삶 속에서 능력으로 나타나지 못합니다. 우리가 나아가야 할 자리는 분명합니다. 바로 에피그노시스,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 알고 그 은혜를 붙잡는 자리입니다.

여러분, 에피그노시스는 삶을 변화시키는 지식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신약 성경에 나오는 베드로의 이야기입니다.

베드로는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단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했습니다. 지쳐서 그물을 손질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오셔서 말씀하십니다.
“네 배를 잠시 빌리겠다.”

예수님은 그 배에 올라타셔서 무리에게 복음을 전하신 후,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져라.”

그때 베드로는 대답합니다.
“주님, 제가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제 경험으로는 지금은 고기를 잡을 수 없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한번 그물을 던져 보겠습니다.”

그는 믿음이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놀란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 무릎 꿇고 고백합니다.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

베드로는 처음에는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말씀에 의지해 순종했을 때,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어부로서 누구보다 잘 알던 경험적 지식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예수님의 말씀 앞에 순종했을 때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배에 오르신 이유는 단순히 군중에게 말씀하시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베드로를 부르시기 위한 의도가 있으셨던 것입니다. 말씀을 듣던 베드로의 마음에 감동이 임했고, 결국 말씀에 순종하자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 경험은 베드로로 하여금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 아닐까요? 믿음이 온전히 있지 않아도, 말씀에 의지해 순종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 경험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분명히 알게 되고, 삶이 변화되는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안다는 것, 예수님을 아는 지식에 의한다는 것은 곧 복음과 그 말씀을 알고 이해한다는 의미입니다. 오늘 본문 속 베드로처럼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던졌을 때, 그는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진리구나. 그분의 말씀에는 능력이 있구나.”
그리고 그 결과를 직접 경험하면서 확신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 사건 이후로 예수님을 따라 3년 동안 제자 중에서도 수제자로서 열정적으로 주님을 따르고 사역을 함께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 잡히시던 그 밤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닭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

베드로는 강하게 부인했습니다.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실제로 그는 예수님이 잡히시던 순간, 칼을 빼어 말고의 귀를 베어버릴 만큼 행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닭이 울자 그는 예수님의 말씀이 기억났고, 밖에 나가서 통곡했습니다.

그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을 보았고, 장사된 것도 직접 확인했습니다. 제자들은 두려움에 숨어 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을 찾아오셨습니다. 마리아가 무덤이 비었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 가장 먼저 달려가 확인한 사람도 베드로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고, 함께 식사까지 하게 됩니다.

그 순간부터 베드로의 삶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고백이 성령의 깨달음이었다면,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고 만난 경험이 그의 신앙을 명확한 지식, 곧 에피그노시스로 변화시킨 것입니다.

그는 복음, 곧 예수님의 부활을 담대히 증거하는 사도가 되었고, 마침내 자신의 목숨을 다 바쳐 순교의 자리까지 나아갔습니다. 그가 증언할 때 수천 명의 사람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바로 명확한 지식입니다. 할렐루야! 이것이 에피그노시스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곧 복음의 말씀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지식이 되어야 합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이 복음을 단순히 들었습니까? 알고 있습니까? 깨달았습니까? 그러나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 말씀이 실제로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되어야 합니다.

제가 종종 말씀드리듯이, 성경에 ‘안다’라는 단어에는 네 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바로 기노스코, 에이도, 그노시스, 에피그노시스입니다.

예를 들어, 장로님께서 최신 스마트폰을 새로 주문하셨다고 생각해 봅시다. 요즘은 화면이 접히기도 하고, 내구성도 뛰어나서 망치로 두드려도 잘 깨지지 않는다고 하지요. 장로님이 그 스마트폰을 주문했을 때, “핸드폰이 도착했습니다”라는 문자를 받으면, 아! 핸드폰이 왔구나 하고 아는 것, 이것이 바로 기노스코(알다)의 단계입니다.

이제 택배 상자를 열어 실제로 핸드폰을 보고 확인할 때, “아, 이게 바로 그 제품이구나!” 하고 깨닫게 되는데, 이것이 에이도(보고 알다)의 단계입니다. 이어서 설명서를 읽고 관찰하며 기능을 이해하는 것은 그노시스(이해하는 지식)의 단계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면 아무 소용이 없지요. 실제로 핸드폰을 사용해 보고, 그 기능을 경험하며 유익을 누릴 때, 비로소 그것이 에피그노시스(삶을 변화시키는 지식)가 되는 것입니다.

저도 사진을 찍다가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인물 사진을 찍었는데, 누군가가 실수로 배경에 잡혔습니다. 그런데 기능을 눌러 보니 사람이 싹 사라지고 배경만 남는 거예요. 이런 놀라운 기능을 실제로 사용해 보니 얼마나 유익한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명확한 지식이란 단순히 아는 것이 아니라, 사용할 수 있는 지식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 안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을 알고, 이해하는 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믿음으로 적용하고 행동에 옮길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이것을 영적 성장이라고 말합니다. 곧 “의의 말씀에 익숙한 자”란, 말씀을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실제로 사용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히 듣고 아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것을 믿음으로 붙잡고 사용해야 합니다. 말씀은 치유의 영역에서, 재정의 문제에서, 혹은 삶의 변화를 필요로 하는 여러 부분에서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성경과 복음 안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풍성한 은혜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알고 있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이해하며, 믿음으로 사용해야 비로소 그 유익을 누리게 됩니다. 할렐루야! 이것이 바로 말씀을 묵상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여러분의 삶에 지금 어떤 변화가 필요합니까? 마음의 문제입니까, 환경의 문제입니까? 그렇다면 말씀을 더 깊이 묵상하십시오. 말씀을 더욱 살펴보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명확한 지식, 곧 사용할 수 있는 정확한 지식(에피그노시스)의 자리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어설프게 아는 것으로는 안 됩니다. 정확히 알아야 하고, 그 지식이 지속적으로 믿음 안에서 작동해야 합니다. 에피그노시스는 단순한 깨달음을 넘어, 끊임없이 말씀을 신뢰하며 붙드는 지속적인 인식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변화를 주는 정확한 지식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사랑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십시오. 단순히 말씀을 듣는 데서 멈추지 마시고, 그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성령의 감동으로 주실 때 믿음으로 순종하십시오. 그럴 때 말씀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1장 17절에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을 위해, 그들이 하나님을 명확히 알고 복음의 지식에 이르기를 기도했습니다. 오늘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히 머리로 아는 수준에서 멈추지 말고, 말씀을 믿고, 믿음으로 행동하며, 사용할 수 있는 정확한 지식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말씀을 살아내는 삶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혹시 단순히 눈에 보이는 감각적 지식 안에서만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눈에 보이고 느껴지는 환경 속에서 불안해하고, 절망하고, 원망하며, 근심과 염려에 붙잡혀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말씀을 더 깊이 묵상하시길 축복합니다. 말씀에 관한 정확한 지식을 얻으십시오. 그리고 그 말씀이 믿음이 되어 날마다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안에 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는 명확한 지식이 될 때, 우리 안에서 흘러나와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됩니다. 이것을 행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우리와 같은 완전한 사람이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보다 더 큰 일을 하리라.”

예수님은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그분 안에 계셨던 성령님이 이제 우리 안에 계시며, 십자가의 구속을 통해 이미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 안에서부터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 흘러나와야 합니다.

그 길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바로 에피그노시스, 사용할 수 있는 정확한 지식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더 필요하다면 더욱 묵상하십시오. 단순한 고백에서 멈추지 말고, 그 말씀이 믿음이 되어 지속적인 인식과 명확한 지식으로 자리 잡도록 하십시오. 믿음으로 고백하고, 믿음으로 행동하십시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 가운데 놀라운 구원과 부르심을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오늘도 그 은혜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나눔질문

1. 복음의 능력: 최근 “복음이 정말 기쁜 소식”임을 체감한 순간은 무엇이었나요? 무엇이 바뀌었나요?
2. 아는 것 → 사용하는 것: 나는 지금 말씀을 ‘정보/이해/확신/사용’ 중 어디에 있나요? 한 가지 사례로 설명해 주세요.
3. 감각 vs 계시: 최근 환경·감정(감각 지식)에 흔들렸던 일을, 말씀(계시 지식)은 어떻게 다시 보게 했나요?
4. 작은 순종: 이번 주 말씀을 “사용”하기 위해 오늘 당장 실천할 작은 순종 1가지는 무엇인가요?
5. 인물 적용: 요셉·사무엘·베드로 중 한 인물을 골라, 내 상황에 적용할 한 문장 결단을 적어보세요.

 

마무리

복음은 단순히 머리로 아는 지식이 아니라, 삶을 실제로 변화시키는 능력 있는 지식이어야 합니다. 세상의 감각적 지식은 한계가 있지만,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주신 계시의 지식은 우리를 새롭게 하고 삶의 방향과 가치를 바꿉니다. 요셉, 사무엘, 베드로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할 때 우리는 기쁨과 감사, 그리고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듣는 데 머물지 말고 깊이 묵상하여 에피그노시스—삶을 변화시키는 명확한 지식—으로 나아가야 하며, 이를 통해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은혜와 능력이 드러나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