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본문
[고린도전서 1:18~25]
18.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21.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십자가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가장 잘 알고, 또한 우리 마음에 지혜로 깨닫고 붙잡아야 할 것은 바로 예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예수님을 생각할 때, 우리는 십자가를 떠올립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 어떤 마음과 모습이 연상되십니까?
오늘 성경은 십자가에 대해 두 가지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을 말씀합니다. 첫째, 세상은 십자가를 미련한 것으로, 실패의 상징으로 여깁니다. 십자가는 있는 그대로 보면 저주의 상징이며, 죄인이 받는 형벌의 상징입니다. 그 시대에 죄인들은 십자가에 매달려 사형을 당했습니다. 십자가는 죄인이 죄의 형벌을 받고 죽임을 당하는 형틀입니다. 십자가는 죄인이 달려 죽는 것,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처럼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십자가의 의미를 잘 알지 못합니다. 십자가를 기독교인들이 달고 다니는 장식물 정도로 생각하거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으로만 여깁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십자가는 큰 의미가 되지 않습니다. 죄인이 형틀에 달려 저주를 받고 죽은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성공이나 아름다움, 탁월함이나 놀라운 것들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바라보고, 십자가를 따르고, 십자가에 순복하며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참으로 미련해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자들은 이 십자가의 의미를 알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더 나아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가장 탁월하게 드러난 자리입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 자리입니다. 따라서 오늘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십자가의 도는 헬라어로 로고스, 즉 십자가에 관한 메시지 또는 말씀을 의미합니다. 십자가의 메시지는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해 보일 수밖에 없지만, 구원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알게 합니다. 십자가의 도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이며, 곧 복음의 메시지입니다.
2천 년 전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사건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을 넘어 인류의 모든 죄를 대속하고 인류를 사랑하여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표현입니다.
복음의 중심은 기쁜 소식이며, 그 중심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 관한 좋은 소식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만약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끝났다면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 또한 헛된 것이라고 합니다. 특히 하나님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헌신하고 삶을 살아간 사람들이 가장 불쌍한 자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없다면 저와 여러분처럼 예배드리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 봉사하는 것은 가장 미련한 짓이며, 더 나아가 가장 어리석은 결과일 것입니다.
그러나 기쁜 소식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으로 끝나지 않으시고 약속대로 3일 만에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당하셨고, 또한 그 은혜를 통해 약속대로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우리에 대한 구원을 이루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핵심이며 기쁜 소식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3-4절 말씀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으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고”
결국 이 말씀은 가장 중요한 복음의 핵심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입니다. 그것은 결국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가 자격 없는 죄인이었을 때, 죄인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죄의 결과는 사망입니다. 그 사망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죽음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 죽음은 육체적인 죽음입니다. 두 번째 죽음은 하나님과의 분리되는 영적인 죽음입니다. 세 번째 죽음은 육체적인 죽음을 넘어 영원한 심판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를 진정한 사망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육체적으로 죽는 것이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분리를 통해 결국 영원한 사망, 즉 영원한 심판 아래 들어가는 것, 영원한 형벌 아래 들어가는 것이 바로 진정한 사망이며 진정한 죽음입니다.
결국 우리는 어떤 존재입니까?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고 말했듯이, 우리는 영원한 심판, 영원한 죽음, 영원한 사망에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한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예수님께서 대신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 하나님의 말씀대로 다시 살아나신 것이 바로 복음의 핵심입니다.
십자가는 우리 신앙의 중심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십자가에 관한 말씀을 끊임없이 묵상하고, 십자가에서 일어난 일들을 자세히 이해하고 숙고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십자가를 미련하다고 여깁니다. 세상의 지혜로는 이 은혜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도 세상의 지혜로는 이 은혜를 알 수 없다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해 보더라도 십자가의 죽음과 그 안에서 일어난 일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전도의 미련한 것을 통해 이 은혜를 알게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도의 미련한 것을 통해 믿음을 주시고, 그 믿음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우리에게는 십자가, 십자가의 도, 십자가에 관한 말씀을 전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도들은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하신 예수를 증거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 말을 거리껴했지만,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하신 예수를 증거하는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회개하고 돌이켜 세례를 받고 구원받는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모습입니다. 사도들이 일어나 십자가의 도에 관해 설명하고 가르치기 시작했을 때, 십자가가 무엇인지, 십자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분명히 알려주었습니다. 십자가는 죄인들이 형벌을 받고 죽는 사형의 틀이지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받으신 자리입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하시고 우리가 받아야 할 영원한 심판을 받으시기 위해 음부에까지 내려가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음부, 지옥에까지 내려가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음부에까지 내려가신 것은 결국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 심판의 자리까지 내려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죽음, 사망, 어둠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약속하신 대로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분께서 하나님이 보내신 진짜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의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 믿을 때에 바로 구원하는 은혜가 바로 저 여러분 안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하기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말씀합니다. 죄인 된 나도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고 예수님이 장사 지내셨을 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나도 함께 장사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일으키셨을 때 우리도 그 안에 함께 있었고 예수님이 하늘에 앉으실 때 저와 여러분도 그 안에 함께 있었습니다. 이것이 동일시라는 은혜입니다. 함께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일어난 이 놀라운 일은 바로 저와 여러분 안에 일어난 일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전도의 미련한 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 사실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의 지혜로는 알 수 없습니다. 혹시 예수님의 십자가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물어보고 가르쳐 주십시오.
왜 못 믿는지 아십니까? 성경은 말하기를 전하는 이 들어야지 믿는데 전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들을 수가 없고 듣지 않으니까 무엇이 생기지 않느냐고 말씀합니다. 믿음이 안 생기고 믿음이 없으니 구원받을 수 없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자의 발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십자가의 도에 대해 말씀하고자 합니다. 십자가에 관한 말씀을 잘 알고 있는지, 기회가 되는 대로 질문하고 가르쳐 주십시오.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그 믿음 안에서 구원받는 수를 매일 더해가는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이 십자가는 결국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절정입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최고의 사랑에 대한 표현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로마서 5장 8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즉 사랑받을 만한 자격이나 조건이 되어 있지 않을 때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사랑이 동시에 나타나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죄에 대한 심판, 즉 형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죄를 용서하고 구원하시는 은혜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로움을 나타냅니다.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죄, 하나님을 배반한 죄에 대한 심판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 심판은 결국 사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모든 죄에 대한 진노, 저주, 심판을 하나님께서 언제 완전히 이루셨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가 죄에 대한 하나님의 놀라운 심판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포함한 인류가 하나님을 배반한 태초의 사람 아담의 죄를 심판하시는데, 그 심판을 누가 대신 받으셨습니까? 바로 예수님께서 대신 받으셨습니다. 만약 그것이 없었다면 저와 여러분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영원한 심판을 받아야 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저주 아래 있는 존재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사랑 안에 거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심판과 죄의 형벌을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쏟아 부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감당하셔야 할 무게감이 얼마나 컸을까요? 옆 사람의 삶의 무게도 얼마나 큰지, 인생에 지는 수많은 짐도 얼마나 무거운지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 즉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아담의 배반에 대한 죄의 형벌이 얼마나 컸을까요? 앞으로 인류에게 태어날 모든 사람에 대한 사망 심판과 저주를 예수님께 쏟아 부으신 곳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십자가에서 고통받는 것을 피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부활절 고난주간만 되면 마치 예수님의 고통을 직접 경험하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 어린 양으로 잡히셔서 다음 날 양을 잡는 날에 못 박혀 죽으셨으니, 사실 조금만 참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육체적인 고통만을 생각한다면 왜 못 찾겠습니까? 옛날 우리나라 독립운동 당시 독립운동가들이 받았던 고문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고문을 당할 때 손톱 밑에 바늘을 찌르고 손톱을 뽑는 고통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며칠 동안 지속되는 고통은 견딜 수 없는 수준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겪으신 고통은 단순한 육체적 고통을 넘어섰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류의 죄를 위해 오셨고, 그 대가로 심판과 저주를 받으셔야 했습니다. 하나님과의 단절, 즉 영원한 죽음은 상상하기 어려운 고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류가 타락으로 인해 겪는 모든 고통을 감당하셨습니다. 마음의 고통, 질병, 가난, 멸망 등 모든 것을 감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완전한 인간이셨기에 그 고통을 온전히 느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저에게서 떠나게 하시고 다른 방법이 없습니까?”라고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내 뜻대로 되지 말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씀하시며 하나님의 뜻을 따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도 함께 기도하며 인내심을 가지라고 권유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끊임없이 기도하시며 인내심을 가지고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셨습니다. 육신은 약했지만, 그 안에 흐르는 은혜로 모든 것을 감당하셨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죄인임을 분명히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자격 없는 자유를 주셨습니다. 십자가는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는 증거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독생하신 아들 예수님을 죽이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인간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사랑입니다. 자녀를 희생하여 다른 사람을 살리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바울은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넓이와 깊이와 높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그 사랑 가운데 뿌리가 내리고”라고 기록했습니다. 우리가 인간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완전하고 최고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크고 놀라운 사랑을 십자가를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십자가는 죄인들을 향한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사랑의 표현이자 그 사랑에 대한 확증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무언가를 잘했을 때 받은 보상이 아닙니다. 아무런 자격이나 조건이 되지 않았고 오히려 심판의 대상이었을 때, 그러한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를 가리켜 무조건적인 사랑, 희생적인 사랑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자격이 되는 사람을 사랑하기는 쉬워도 자격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정말 사랑할래야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저는 이번에 대통령 후보 중 김문수 후보를 새롭게 보았습니다. 그동안 언론에서 고지식한 이미지만 보다가 대통령 후보를 살펴보면서 감동적인 일화를 알게 되었습니다. 경기도 지사 시절, 한센인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을 멀리했습니다. 예전에는 한센병 환자들이 아이들을 잡아먹는다는 소문 때문에 산에 가면 잡아먹는다고 겁을 주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한센병 환자가 들어오면 돌을 던지고 쫓아내고 모욕했습니다. 그런데 김문수 지사는 그곳에 가서 그들과 함께 밥을 먹고 잠을 자면서 그들의 고충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복지를 제공하고 학교를 세웠습니다. 한글도 공부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김문수 지사께서 한센병 환자분들을 위해 학교를 설립하고 교육을 제공한 결과, 그분들이 한글을 배우고 감사의 편지를 쓰는 모습을 보며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과거 한센병에 대한 편견으로 인해 고립된 삶을 살았던 분들이 이제는 믿음에 헌신한 사람들의 도움으로 교육의 기회를 얻고, 감사를 표현하는 모습을 보니 더욱 감격스러웠습니다.
특히, 한센병 환자분들이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멀리할 때 손을 잡아주고 안아준 사람은 없었다”라고 말씀하신 부분은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과거 소록도 등에서 한센병 환자분들과 함께 먹고 자며 복음을 전했던 사람들의 헌신적인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김문수 지사께서는 단순히 사진 촬영이나 형식적인 방문에 그치지 않고, 직접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진심으로 교류하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는 많은 정치인들이 본보기로 삼아야 할 행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사랑하기 쉬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쉽지만, 온몸에서 역겨운 냄새가 나고 씻지도 않고 더럽혀진 사람을 안아주고 사랑할 수 있는지 질문하셨습니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 그러한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이며, 그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독생자를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걱정하거나 염려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와 함께하고 있음을 믿고 나아가야 합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옆 사람의 안위를 염려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무엇이 부족하십니까? 오늘 찬양은 매우 감동적이었습니다. 예수님으로 충만하다면 다른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예수님으로 충만하다는 것은 그분의 사랑이 함께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엇이 염려되고 걱정되어 마음고생을 합니까? 그 사랑이 우리와 함께하기 때문에 오늘 사랑받는 자녀의 모든 상황들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랑받는 자녀로서 승리가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결론은 이미 정해진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보다 더 확실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가장 불안한 것은 불확실한 미래입니다.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불확실하기 때문에 불안하고 초조하고 걱정하고 염려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결론은 이미 말씀 안에서 정해져 있습니다. 그분의 사랑을 통해서 우리의 결론은 정해져 있습니다. 얼마나 행복합니까? 얼마나 불안할 것이 없습니까? 우리가 불안하다는 것은 정말 우리가 그분의 사랑을 놓치고 있지는 않는지, 그 사랑 가운데 우리가 세움을 입은 그 은혜를 우리가 놓치고 있지는 않는지 한번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최고의 사랑을 받았고 받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성경에 말씀하기를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정말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우리 스스로 인간적으로 해서 해결할 수 없는 그 일들을 바로 하나님께서는 이 십자가라는 것을 사용해서 그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인간적으로 보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그 시대에 구원자로 메시아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우리를 구원할 유대의 왕이 태어났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제자들 또한 예수님을 따르면서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주님의 나라가 임할 때, 그 좌우편에 자리가 주어지기를 바랐습니다. 마치 장관이나 국무총리와 같은 권세 있는 자리에 오르는 것처럼 말입니다. 저는 주님께서 구원자로 오셔서 이스라엘을 회복하시고 다윗 왕과 같은 영광을 회복하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드디어 우리를 억압에서 해방시킬 왕이 오셨다고 환영했습니다.
하지만 왕으로 오신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기대했던 왕이 아니었습니다. 사단 역시 메시아 구원자가 태어나면 죽이려고 했습니다. 헤롯 왕이 유대의 왕이 태어났다는 소문을 듣고 갓난아기들을 모두 죽인 것처럼 말입니다. 사단은 왕이 태어나면 자신의 머리를 밟을 것을 알기에 죽이는 일을 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죽지 않으셨습니다. 유대의 왕으로 나타나 사단과 어둠의 세력을 대적하시고, 사단에게 묶여 있던 자들을 해방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질병에 사로잡힌 자들을 치유하시고, 사단의 사망과 죽음의 권세로 인해 고통받던 자들을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는 곳마다 복음의 기쁜 소식이 전해졌고, 사람들은 자유를 얻었으며, 귀신에 사로잡혀 질병으로 고통받던 자들이 회복되고 온전해졌습니다.
사단은 메시아를 죽이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사단은 이제 저 왕을 죽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단은 이것이 아니었음을 곧 깨달았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외칩니다.
“네가 메시아라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그 십자가에서 내려와라.”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내려오지 않으셨습니다. 내려오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 일을 이루시는 것이 결국 그 죽음이 승리임을 아셨기에, 그 안에서 “내가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시고 거기서 운명을 다하셨습니다.
이 십자가는, 왕으로 오신 분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은 실패로 보였지만, 그 안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었습니다. 무엇일까요? 죽음과 어둠의 권세,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그 죽음 가운데서 부활하시는 하나님의 생명으로 죽음과 심판과 저주, 그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일어나신 승리, 그 살리신 하나님의 능력이 그곳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약속하신 대로 3일 만에 부활하셨는데, 예수님을 따랐던 수많은 제자들이 그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고 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충만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증거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죄와 사단을 무찌르신 승리의 자리였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는 실패처럼 보였지만, 그것을 믿는 믿음의 눈으로 바라본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실패로 끝난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것을 통해서 인류에 관한 모든 사망과 저주에 관한 문제를 해결한 바로 승리의 자리가 바로 이 십자가의 자리였던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 믿는 자들에게는 십자가는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곳입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심에 은혜가 우리가 그 사실을 믿을 때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 사실을 믿을 때에 우리를 구원하는 능력이 그 안에 역사하기 시작합니다. 죄인 되었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이 심판받을 수밖에 없는 저와 여러분이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되는 곳이 바로 그곳입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새 것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최고의 걸작품으로 지어진 곳이 바로 그곳입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하고 새롭게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곳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그러한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십자가가 우리 삶에 주는 변화는 무엇일까요? 저와 여러분은 십자가의 능력으로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자유인이 되었고, 죄의 자리에서 생명의 자리로, 의의 자리로 변화되었습니다. 신분이 변화되고 우리의 위치가 변화된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십자가를 바라볼 때, 십자가가 우리 삶에 줄 수 있는 첫 번째 변화는 자존감 회복입니다. 십자가는 분명히 말씀합니다. “너는 사랑받기 위해 창조된 존재다. 너는 실패가 아니고 하나님의 최고의 걸작품이다.”
세상이 말하는 어떠한 조건이 아니라, 오늘 십자가 상에 일어난 은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타날 때,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알게 합니다. 그러므로 낮아진 우리의 자존감이 세워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지어졌고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그 순간 하나님의 최고의 사랑을 받았고, 그 사랑을 받는 존재로 지어졌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의 존재는 예수님의 생명 값을 주고 살리심을 받은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예수님의 생명을 대가로 사신 바 되었다고 말씀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생명을 내어주시고 이 구원을 받았고 새롭게 지으심을 받았으니 얼마나 귀한 존재입니까? 바로 그 예수님의 가치가 결국 우리의 가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요 한 자매입니다. 가장 존귀하고 가장 귀한 존재입니다. 어느 부자가 1억 원이 되는 수표를 청년에게 주었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셨습니까? 그런데 어떤 상황 때문에 그 청년이 화가 나서 1억 원짜리 수표를 찢어서 버렸다고 합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참 후회되어 그 수표를 수거해 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 찢어진 수표가 쓸모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거나, 그 가치는 여전히 존재합니까? 그 가치는 훼손되지 않고 존재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어디에서 누구에게서부터 나왔기 때문입니다. 받은 자가 아니라 주는 사람에게서 왔기 때문입니다. 1억 원이라는 수표를 주었기 때문에 받은 사람이 찢어 버렸다고 해서 그 존재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 근거가 어디서부터 왔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부자로부터 왔기 때문에 그 가치는 여전한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가치도 마찬가지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디에서 왔습니까?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왔습니다. 그분의 사랑을 통해서, 그분의 가치를 통해서 지음을 받은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땅의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훼손될 수 있습니다. 조금은 훼손될 수도 있고, 조금은 기스가 날 수도 있고, 조금은 상처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멸시를 받을 때도 있고, 때로는 억울함을 당할 때도 있지만, 우리의 존재 가치는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디로부터 왔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왔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가장 귀하게 여기십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용서의 능력을 주시는 곳이며, 우리는 십자가에서 최고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받은 은혜는 우리에게 다른 사람을 향한 용서를 가능하게 합니다. 십자가는 관계를 회복하는 능력의 열쇠입니다.
손양호 목사님께서는 “내 아들을 죽인 자를 사랑하는 것, 그것이 십자가의 길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손양호 목사님의 두 아들은 공산주의 청년에게 살해되었습니다. 손양호 목사님께서는 그 청년을 사랑했고, 용서했으며,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 청년을 양자로 삼아 키웠습니다. 그 청년은 죄책감 속에서 살았지만, 손양호 목사님의 큰 용서로 인해 변화되었습니다. 그 청년의 아들은 목사가 되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큰 용서를 받았기에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용서는 관계 회복의 중요한 열쇠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받은 사랑을 통해 관계 회복을 이룰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인생과 삶의 목적을 변화시키는 은혜를 주십니다.
우리가 그 은혜를 아는 순간,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자신을 위해 죽으신 그분을 위해 살아가는 삶이 됩니다. 고린도후서 5장 15절 말씀처럼,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있는 자들로 하여금 이제부터는 그들을 위하여 죽으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아멘.”
십자가는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삶에서 이타적인 삶으로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은혜를 알고 그 사랑을 받는 순간, 삶의 이유와 목적이 달라집니다. 자신의 번영과 성공, 부를 위해 살아가지 않습니다. 사랑을 아는 사람은 어떤 삶으로 변화할까요? 자신을 위해 죽으신 그분의 부르심과 그분의 뜻을 분별하고, 그 뜻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려고 하는 것이 진정한 변화입니다.
우리는 매주 금요일 중보 기도 시간에 그리스도의 향기 교회 지체들을 위해 하나님의 부르심을 알고 그분의 뜻을 이뤄가는 성공적인 삶을 위해 기도합니다. 우리 각자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습니다.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자신과 자신의 번영, 유익만을 위해 살아간다면 얼마나 불쌍한 인생일까요? 우리 삶 속에서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목적을 발견하고 그분을 위해 살아가는 삶이 최고의 인생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는 삶의 목적과 의미, 가치를 변화시켜 더 큰 행복을 가져다줍니다.
더 나아가 십자가는 고난을 상징합니다. 고난을 이기는 어려움을 이길 수 있는 힘이 바로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에서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시고 모든 것을 감당하신 것은 그 앞에 있는 즐거움과 영광 때문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본다면, 삶에는 고난과 핍박,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은혜를 우리 안에 적용한다면 고난 뒤에는 반드시 영광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이 땅에서 헌신하고 수고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돈을 벌어서 헌금을 드리고, 그 헌금을 통해 복음이 전해지는 일, 나아가 하나님의 뜻을 이행하기 위해 헌신하고 봉사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려움도 따르지만, 십자가를 바라볼 때 그 뒤에는 반드시 영광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고난이 고난이 아닌 기쁨과 감사함으로 감당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이 나타나는 은혜가 있는 곳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십자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나에게 이 십자가는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그리고 이 십자가를 바라보며 이 땅의 삶에서 또 하루를 살아가는 동안 내 인생을 어떻게 바라보고 나아가야 할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마지막으로 갈라디아서 6장 14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
우리 인생에서 바울의 고백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는 고백처럼, 이 십자가의 은혜가 우리의 자존심과 정체성, 나아가 우리 삶의 방향과 능력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 은혜를 다시 한번 붙잡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말씀 속으로
마무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세상에는 미련하게 보일지라도, 우리 믿는 자들에게는 죄와 사망, 저주를 이기신 하나님의 능력이며, 자격 없는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희생적인 사랑의 확증입니다. 이 십자가는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시키는 은혜의 자리이며, 자존감의 회복, 관계의 회복, 삶의 목적과 방향의 변화까지 이루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하며, 그 사랑과 능력을 붙들고 고난 중에도 승리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