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본문

[고린도후서 5:17]
17.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갈라디아서 6:15]
15.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옛 본성과 새로운 피조물의 삶

성경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새로 지음을 받은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시작은 하나님의 창조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사람을 지으신 것이 바로 우리의 근원이죠.

그런데 신약에 이르러,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이루신 이후, 성경은 다시 한 번 우리에 대해 이렇게 선포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린도후서 5:17)

또한 갈라디아서 6장 15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라고 강조합니다.

이처럼 성경은 하나님께서 처음 사람을 창조하신 ‘첫 번째 창조’가 있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다시 지으시는 ‘두 번째 창조’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 두 번째 창조는 바로 예수님을 믿는 저와 여러분에게 주어진 새로운 정체성이자 은혜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거듭남’이라고 부르며, 더 나아가 ‘하늘로부터 태어남’, ‘성령으로 난 자’, ‘진리의 말씀으로 태어남’이라 표현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참된 창조의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이 놀라운 은혜를 더 깊이 묵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새로운 피조물로서, 하나님께서 다시 창조하신 존재로서, 우리는 어떤 태도로 이 땅을 살아가야 하는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오늘의 제목을 ‘옛 본성과 새로운 피조물의 삶’이라고 정한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창조’에 대해, 곧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삶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반드시 먼저 다루어야 할 주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옛 본성’, 타락한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이해입니다.

우리는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이후, 인간의 본성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 속에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었습니다. 성경은 이 사건을 ‘죄’라고 정의합니다.

그 이후, 인간의 내면—곧 본성에는 뚜렷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창세기 3장은 이 내면의 변화를 매우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을 제대로 이해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새 창조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깊이 깨달을 수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먹은 후 하나님께서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듣고 숨게 됩니다. 9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을 부르시며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시자, 아담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이 장면은 인간 내면에 일어난 근본적인 변화를 잘 보여줍니다. 원래 그들은 벗고 있었지만, 수치심이나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벗은 상태였으나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죠. 그런데 선악과를 먹은 순간, 갑자기 자기 자신을 보게 됩니다. “내가 벗었구나” 하는 인식이 생기고, 그 인식은 곧 수치심으로 이어지고, 수치심은 두려움으로 이어졌습니다.

이전에는 하나님을 바라보던 인간이 이제는 하나님이 아닌 ‘자기 자신’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 시선은 하나님의 관점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었고, 그 결과 벗은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때 처음으로 인간 안에 수치심과 부끄러움이 들어오고, 그것은 결국 하나님 앞에서 숨고 싶은 두려움으로 연결됩니다.

이처럼 죄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한 시선을 거두고, 자신을 중심으로 보는 시각을 갖게 만듭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의 본성, 곧 옛 본성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옛 본성을 제대로 이해할 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새 창조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인지를 더욱 깊이 깨닫게 될 것입니다.

도대체 이 두려움은 어떤 두려움이었을까요?

하나님께서 “아담아,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부르시는 그 순간, 아담은 선악과를 먹고 나서 처음으로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인식하게 됩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게 되었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며 한 가지 사실을 깨닫습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존재구나. 나는 자격이 없구나. 이 상태로 하나님 앞에 서면 수치심과 부끄러움 때문에 죽을 수도 있겠구나.’

이러한 생각이 그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일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인간이 타락한 이후 가장 먼저 생겨난 감정이 바로 수치심과 두려움입니다. 이는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요?

인간은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순간, 곧 하나님을 향한 시선을 거두고 자신을 중심으로 바라보게 되는 순간, 필연적으로 수치와 부끄러움, 그리고 두려움을 경험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타락 이후 아담과 하와에게 가장 먼저 나타난 내면의 변화이며, 그 본성은 이후로도 모든 인류에게 고스란히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본성적으로 먼저 자기 자신의 연약함과 부끄러움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 시선은 자연스럽게 자존감으로 연결되며, 특히 삶의 환경이 억압적이고 수치심을 자극하는 상황 속에 놓이게 될 경우, 그 자존감은 쉽게 무너지고 바닥을 치게 되는 것이죠.

결국 타락한 인간의 본성은, 하나님을 바라보기보다 자신을 중심에 두고 스스로를 판단하는 시선으로 인해 수치심과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었고, 그로 인해 우리의 정체성과 자존감마저 흔들리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어떤 삶을 살아오셨습니까? 어떤 환경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살아오셨나요?

사실 많은 사람들은 인생을 살아가며 사람과의 관계, 특히 가정 안에서 부모로부터 받은 거절이나 부정적인 평가로 인해 깊은 상처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칭찬보다는 잘못된 점을 지적당하는 경험이 반복된다면, 그 사람의 자존감은 점차 무너지고, 자기 인식은 부정적인 방향으로 굳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내면의 상태는 대인관계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게 되죠. 자신감 없이 타인을 대하고,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데에도 주저하게 됩니다.

이런 성향을 단순히 “성격”이라고 부를 수도 있지만, 사실 그 뿌리를 들여다보면 그것은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 인간에게 들어온 본성이, 삶의 환경과 맞물려 더 강하게 나타난 모습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어떤 상황 앞에서 쉽게 나서지 못하고,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요구하거나 부탁할 때도 거절당할까 봐 미리 두려워하고, 결국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하게 됩니다.

이러한 내면의 모습은 때로는 우울감이나 상실감으로 이어지기도 하며, 그 원인은 결국 타락 이후 인간에게 각인된 왜곡된 자아 인식에서 비롯됩니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은 하나님 앞에서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고백 속에는 인간 본성의 변화가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죄를 지은 후, 인간은 자신을 바라보기 시작했고, 그 결과 수치심과 두려움이 내면 깊이 자리 잡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감정은 곧 책임 회피와 자기합리화라는 또 다른 형태로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내가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의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라고 물으시자, 아담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 여자가 내게 열매를 주므로 내가 먹었습니다.”

즉, 아담은 하나님께서 주신 여자 탓을 하며, 사실상 하나님을 향해 책임을 돌리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는 책임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그 여자가 내게 줬기 때문에 나는 어쩔 수 없이 먹었을 뿐입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 본성의 대표적인 특징입니다.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기보다 남을 탓하고, 상황을 합리화하고, 핑계를 대는 태도로 바뀌게 된 것이죠.

하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어찌하여 이것을 먹었느냐”고 물으시자, 하와는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선택이 아니라 누군가의 유혹 때문이었다고 책임을 전가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본성의 변화는 단지 생각이나 태도의 문제가 아닙니다. 실제적인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하나님은 뱀에게는 흙을 먹고 다니는 저주를 내리셨고, 여자에게는 임신과 출산의 고통, 남편에 대한 갈망과 그에 따른 지배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남자에게는 땀 흘려야만 얻는 수고의 삶, 땅의 저주,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나는 세상을 선포하셨습니다.

이 모든 장면은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는 순간, 인간의 본성과 삶의 방향이 얼마나 근본적으로 변화되었는지를 분명히 보여줍니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그 순간부터, 인간은 수치심과 두려움, 책임 회피와 자기합리화, 그리고 결국 고통과 수고의 삶 속으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기 전, 인간은 자신의 연약함이나 부족함을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볼 수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님만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하나님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인식하는 것이 인간의 본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순간, 인간 내면에는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하나님보다 자기 자신을 먼저 보게 된 것입니다. 자기를 바라본 결과, 수치와 부끄러움, 그리고 두려움이 일어났고, 이는 곧 책임을 회피하고 자신을 합리화하는 태도로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옛 본성의 시작입니다.

이러한 본성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을 통해서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 곧 애굽에서 무려 400년간 종의 삶을 살았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노예로 살아온 그들의 삶은 자유가 아니라 억압과 지배의 연속이었죠. 400년이면 거의 4~5세대가 지나간 시간입니다.

요셉 시대의 첫 세대는 비교적 평안했을지 모르지만, 요셉이 죽은 후 새로 일어난 왕조 아래에서 이스라엘은 철저한 노예 신분으로 전락했습니다. 노예로 태어난 사람은 스스로 자유를 상상할 수 없습니다. 도망치다 잡히면 낙인을 찍히고, 끝없는 억압 속에 살아야 하는 것이 노예의 삶입니다.
이처럼 자유에 대한 개념조차 갖기 어려운 환경에서 400년을 살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자유인이 누릴 수 있는 자유인의 생각이 자리 잡기 어려웠습니다. 대신에 종의 습관, 종의 사고방식이 깊이 뿌리내리게 된 것이죠.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비록 하나님께서 기적을 통해 그들을 이끌어내셨지만, 어려움을 마주할 때마다 다시 옛 사고방식, 종의 본성으로 되돌아갔습니다.

민수기 14장 22~23절 말씀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내 이적을 보고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한 그 사람들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며 또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

하나님께서 놀라운 기적과 이적을 베풀어주셔도, 그들은 순간적으로는 믿음이 충만한 것처럼 보였지만, 곧 어려움이 닥치면 종의 본성, 즉 두려움과 낮은 자존감의 자리로 되돌아갔습니다.

이것이 바로 ‘종의 습관’, ‘종의 사고방식’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볼 때는 감사와 감격으로 충만하지만, 조금만 상황이 어려워지면 다시금 자신의 연약함, 부족함, 수치심에 사로잡혀 낮은 자존감으로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 삶에서는 “나는 안 돼. 우리는 메뚜기 같아.”라는 생각에 갇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바라보다가, 믿음이 아닌 두려움과 자기 부정 속으로 다시 들어가는 것이죠.

우리가 지난번에도 나누었듯이, 이 현상을 ‘메뚜기 증후군’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은혜를 바라보는 대신, 자기 자신의 작고 연약한 모습을 의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 마음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 얼마나 힘든 일일까요? 사실 저도 어릴 때는 자존감이 굉장히 낮았습니다. 지금의 모습만 보고 ‘자존감이 늘 충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저는 부끄러움도 많았고, 거절에 대한 두려움도 정말 컸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말 한마디 하는 것,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부탁하는 것조차 몹시 두렵고 힘들었습니다.

지금도 기억나는 일이 있어요. 초등학교 시절, 선생님이 한 친구에게 책을 읽으라고 했는데 그 친구가 잘 못 읽자, 제게 읽으라고 하셨습니다. 책을 들고 일어나는 순간,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졌어요. 당당함보다는 마음이 위축되고, 부끄럽고, 두려운 감정들이 한꺼번에 밀려오면서 글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물이 흘러, 결국 책을 읽지 못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의 저는 정말 자존감도 낮고, 수치심도 많았던 아이였습니다.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요청하거나 도움을 구하는 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혹시 거절당할까 봐 두려워서, 아예 말을 꺼내지 못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처럼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옛 본성, 즉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거절한 이후에 생겨난 그 타락한 본성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을 보면 그 본성이 얼마나 강하게 작용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떠난 이후, 죄의 종이 되어 결국 죽음과 사망의 권세 아래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 상징적인 모습이 바로 400년 동안 애굽에서 종살이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이죠.

물론, 이런 본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누군가는 성장 과정에서 격려와 칭찬을 자주 받으며 자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경우는 어느 정도 건강한 자아 형성이 가능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인정보다는 꾸지람과 질책 속에서 자라왔습니다. 부모님 세대도 마찬가지였기에 “사랑한다”, “잘했다”는 말보다는 “왜 그 모양이냐”, “이 썩을 놈” 같은 상처가 되는 말들을 더 자주 들으며 자랐습니다. 그 결과, 우리 세대 역시 자존감이 낮은 경우가 많습니다. 타락한 본성과 더불어, 그런 환경적 영향까지 더해지니 이보다 더 힘든 조건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죠.

이런 모습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내 이적을 보고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한 그 사람들은…” (민수기 14:22~23)

하나님은 분명히 놀라운 영광과 기적을 보여주셨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반복해서 하나님을 시험하고 불순종했습니다. 왜일까요? 그것은 그들 안에 자리 잡은 본성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도, 잠시 믿음이 솟아오르다가도 결국 다시 본성의 자리로 되돌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인간의 연약한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여전히 옛 본성에 묶인 삶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새 은혜 안에서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바로 우리를 그 얽매인 삶에서 자유케 하고 해방시키기 위해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존귀하고 복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오신 것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은 죄의 종이 되어 사망과 저주 아래 살아가던 우리를 건져내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이루신 그 놀라운 일들을 기억하고, 그 은혜를 붙잡고, 오늘 우리의 삶에 적용하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어떤 사고방식,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지를 다시 붙잡아야 할 때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우리는 더 이상 수치와 두려움 속에서 자신만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자들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죄 아래 있는 저주의 삶, 종된 삶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삶에서 우리를 끌어내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우리에게 자신의 생명을 주시고, 그 생명으로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구원이란 단지 죄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 즉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지어지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거듭남’이라고 부르며, 갈라디아서 2장 20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선포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바울은 분명히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이는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의 옛 자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우리도 그분과 함께 죽은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은 우리 육체의 손에 못자국이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의 내면, 곧 속사람의 이야기요, 우리의 본성과 정체성에 관한 진리입니다. 우리의 옛 사람은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선언합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

이제 우리가 육체 가운데 살아가는 이유는 단 하나,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해 자기 생명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삶입니다.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수치심과 두려움, 당당하지 못한 태도, 낮아진 자존감,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영광을 바라보기보다는 늘 자신의 허물과 연약함만을 바라보는 왜곡된 자기 인식—이런 모든 것들이 바로 아담과 하와 이후 인류가 지닌 옛 본성입니다.

합리화, 책임 전가, 자기중심적인 시선, 그리고 죄와 사망의 굴레 속에 종처럼 얽매여 살아가야 했던 나, 그 옛 사람은 결코 스스로 그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복음은 선언합니다. 그 옛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확실히 선포해야 합니다. 그 수치와 부끄러움, 두려움, 문제만 닥치면 스스로를 자책하고, 자신의 연약함만을 바라보며, 결국에는 그 마음을 합리화와 타인 비난으로 바꾸는 그 옛 본성—그 모든 것을 가진 옛 나는 이미 죽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사건은 나의 옛 자아도 함께 죽은 사건이며, 예수님의 부활은 곧 나도 그분과 함께 다시 살아났다는 선언입니다. 죽음 이후 하나님께서 주신 새로운 생명, 바로 하나님의 생명으로 우리는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새로운 창조’라 부릅니다. 옛 사람은 죽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가져오신 생명과 성품, 하나님의 본성을 지닌 새로운 존재로 우리가 창조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사로잡힌 자가 아닙니다. 나는 자유자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 우리가 믿음으로 선포해야 할 진리입니다.

결국 우리가 이 땅에서 변화되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며 살아가는 모든 과정의 핵심은, 바로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정확한 인식, 곧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창조된 자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지속적인 믿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부터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나는 누구인가?

아담과 하와로부터 유전된 타락한 본성, 썩어질 씨로부터 태어난 옛 나는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나는, 하나님의 속성과 본성, 그분의 생명과 은혜, 풍성함과 부요함, 그리고 하나님만이 지닌 자존감으로 새롭게 태어난 존재입니다.

이 사실을 인식하는 순간, 우리 삶은 반드시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더 이상 과거의 나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지음받은 새로운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어떤 생각으로, 어떤 정체성으로 살아가야 할지를 분명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본성은 바뀔 수 있을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옛 본성은 바뀌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 옛 본성은 반드시 죽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옛 사람은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본성으로 다시 태어난 자입니다. 그렇다면, 새로운 본성은 자연스럽게 삶 속에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미운 오리 새끼’ 이야기를 예로 들어볼까요?

어느 날 한 오리 새끼가 닭들과 함께 자라게 됩니다. 자신도 닭인 줄 알고 엄마 닭을 쫓아다니며 살았죠.

엄마는 말합니다. “모이는 이렇게 쪼아야 한단다, 콕콕콕콕.”

그런데 이 오리는 아무리 해도 잘 안 됩니다. 주둥이는 넓고, 몸짓도 어색해서 매번 실수만 하게 되죠.

형제들에게도, 심지어 엄마에게도 “왜 너는 이것도 못하니!“라는 질책과 조롱을 받습니다. 걷는 모습도 이상해서 “왜 이렇게 뒤뚱뒤뚱 걷느냐”고 핀잔을 듣고, 자존감은 점점 바닥을 치게 됩니다. 늘 부정적인 말만 듣다 보니 스스로도 자신을 무가치한 존재로 여기는 우울감에 빠지게 되었고, 심지어 삶의 이유조차 잃어버린 채 절망 속에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쩌다 물가에 이르게 됩니다. 늘 “물가엔 절대 가지 말라”는 엄마 닭의 말이 있었지만, 그 말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지친 오리는 결국 물속으로 뛰어듭니다.

그런데 그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물 위에 몸이 둥둥 뜨고, 오히려 자유롭게 헤엄치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왜일까요? 그것이 본래 그가 지닌 본성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닭이 아니라, 오리였던 것이죠. 자신의 본성을 몰랐기에 괴로웠고, 비교하며 살았기에 우울했지만, 진짜 자신이 누구인지 깨달은 순간, 그는 자유를 얻게 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옛 본성, 곧 죄와 수치, 거절과 두려움, 열등감과 낮은 자존감에 사로잡혀 살 때 우리는 우울할 수밖에 없습니다. 스스로를 바라볼수록 더 절망스럽고, 살아야 할 이유조차 희미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이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롭게 변화된 존재라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이제는 내 안에 있던 수치와 거절감은 이미 굴러갔고, 이제 나는 하나님께서 새롭게 지으신 자, 하나님의 생명으로 지어진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나는 이제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딸로 당당하게 설 수 있고, 그분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자격 있는 존재입니다. 그 아버지는, 내가 무엇을 구하든 꾸짖거나 거절하지 않으시고, 늘 사랑으로 응답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나를 최고로 지으셨고, 최고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축복하셨으며, 지금도 나와 함께하시며 내 삶을 인도하고 계십니다.

이 사실을 인식하고, 믿고, 매일의 삶에서 되새기는 것—바로 이것이 변화의 시작입니다.

창세기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 그들의 모든 상황을 정리하신 다음 어떤 일을 하십니까? 그들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십니다. 그들이 부끄러워하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이 장면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새로운 은혜를 입히시는 장면입니다. 이전의 수치와 부끄러움을 덮으시고,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시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타락 이전의 인간은 자신의 연약함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바라본 것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이었습니다. 그것이 본래 인간의 상태였고, 창조된 모습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본성으로 창조된 우리는 어떤 사고방식을 가져야 할까요? 더 이상 나의 연약함과 수치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나를 새롭게 하신 하나님, 내 안에 계신 그분의 영광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기 전에는 벗은 줄조차 몰랐습니다. 그들에게는 수치심도 부끄러움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 안에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자신을 보지 않고,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살아간 것이죠.

그런데 타락한 순간, 하나님을 향하던 시선이 바뀝니다. 더 이상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덜 중요한 것—자신의 벗은 몸을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중요하지 않던 것에 집중하고, 두려워하고, 숨게 되는 것, 바로 그것이 타락의 본질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새로운 본성으로 거듭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시선이 바뀌어야 합니다. 무엇을 바라보아야 할까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억지로 하는 일이 아니라, 우리 안에 새롭게 주어진 본성의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본성이 그러하니,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볼수록 더욱 성장하고 변화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거울을 보듯 주의 영광을 바라볼 때에, 영광에서 영광으로 변화되어 간다.” (고린도후서 3:18)

그분의 영광을 바라볼수록, 우리는 계속해서 그 본성대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회복되어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는 문제를 바라보지 마십시오.
상황이 아닌 그보다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문제 속에서 내 연약함과 한계만을 바라보다 보면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보다 크신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분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내 안에 계십니다.

그리고 성경은 선포합니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기고 승리하는 자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린도후서 5:17)

이전에는 우리가 옛 본성에 따라, 혹은 거듭난 이후에도 과거의 실패와 수치, 좌절과 절망 속에 영향을 받으며 살아왔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고, 나는 새롭게 되었음을 기억하십시오.

이 말씀은 제가 가장 사랑하는 구절 중 하나입니다. 에베소서 2장 10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미리 준비하신 것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하며 살아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분명히 선포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여기서 ‘작품’이란, 단순한 결과물이 아니라작품 중의 작품, 최고의 걸작품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지으신 이유는, 우리 삶을 통해 하나님의 뜻과 탁월하심을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선한 일’은 단지 착하고 바른 행동이 아니라, 탁월함과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나는 삶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더 많은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시기를 원하시며, 우리를 통해 자유와 구원의 영향력이 흘러가기를 원하십니다.

이제 더 이상 우리 자신을 바라보며, 우리 안에 있는 연약함과 한계에 주목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 그리고 내 안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우리 이렇게 고백해봅시다.

“나는 하나님의 최고의 걸작품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최고의 작품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시선이며, 오늘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입니다.

더 이상 옛 본성, 옛 습관, 아담과 하와 이후에 생겨난 타락한 사고방식이나 과거의 실패와 상처로 인해 형성된 왜곡된 자아를 나의 정체성으로 여기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새롭게 만들었다. 나의 생명을 너에게 주었고, 나는 너와 떨어져 있지 않다. 이제 나는 너 안에 살고 있고, 너는 나와 하나다.”

“내가 너를 만들 때, 최고의 걸작품으로 손수 지었고, 그 존재가 바로 너다. 잊지 마라. 나는 너에게 내 생명을 부어주었고, 이제 너는 그것을 믿고 생각하기만 하면 된다. 억지로 애쓰지 않아도 괜찮다. 그저 믿음으로 너의 정체성을 인식하기만 하라. 그 순간, 너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자연스럽게 나타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간증이며,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여러분, 변화는 애쓰고 수고하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이 이미 행하신 일을 믿고, 알고, 바라보는 것,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작품은 어디에 있든지 빛이 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직접 만드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빛은 세상 가운데 선한 영향력을 끼칩니다.

빛은 어둠을 몰아냅니다. 여러분이 어려운 사람들, 믿지 않는 자들을 만나게 될 때, 당신이 어떤 말을 하든 안 하든, 여러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빛과 생명, 그리고 하나님의 작품으로 살아가는 은혜의 정체성이 그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치게 됩니다.

그 은혜를 알고, 믿고,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부터, 그들 안에 있던 어둠은 물러가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놀라운 일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사셨던 삶의 방식입니다. 그 동일한 은혜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도 새롭게 지으시고,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피조물의 삶입니다.

오늘 받은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기억하십시오. 이제 더 이상 옛 사람, 옛 본성이 나 자신이 아닙니다. 나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롭게 지어진 존재입니다. 어떤 상황이 오든, 어떤 문제가 닥치든
그 문제 자체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상황 위에 계신 하나님, 내 안에 계신 그분의 영광을 바라보십시오.

이제는 변화된 본성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향해 눈을 들고, 자유자로서, 승리자로서 오늘 하루를 살아가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말씀 속으로

Q1. 성경이 말하는 인간의 시작은 무엇인가요?
Q2.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어떤 변화가 주어졌나요?
Q3.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나요?
Q4. 타락한 본성의 구체적인 특징은 무엇인가요?
Q5. 타락한 본성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떻게 나타났나요?
Q6. 이스라엘 백성의 반복된 실패는 무엇을 의미하나요?
Q7. 옛 본성은 바뀔 수 있나요?
Q8. 새로운 피조물이 된 우리의 정체성은 무엇인가요?
Q9. 본성을 깨달으면 어떤 변화가 생기나요?
Q10. 이 진리를 어떻게 적용해야 하나요?

마무리

우리는 더 이상 아담의 타락 이후 수치와 두려움, 책임 전가와 자기합리화에 사로잡힌 옛 본성의 존재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태어났으며,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으로 창조된 하나님의 걸작품입니다. 변화는 억지로 애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우리 안에 행하신 일을 믿고 바라보는 데서 시작됩니다. 이제 우리의 시선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영광을 향해야 합니다. 그분 안에서 우리는 자유인이며, 선한 영향력을 세상 가운데 흘려보낼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