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본문

로마서 8:29~30

29.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와 같이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존재이며, 그 부르심 가운데 살아가도록 창조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단순한 외형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를 향해 가지신 목적과 계획을 의미합니다.

아침에 찬양팀 자매 하나가 요즘 메이크업을 공부하며 입시를 준비하는 모습을 보며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사실 저 역시 어릴 적 화장에 큰 관심이 있었습니다. 시골에서 자라던 시절, 어머니의 화장품을 몰래 가져와 얼굴에 바르기도 했고, 그 일로 혼이 나기도 했습니다. 그저 호기심이었고, 아름다움을 향한 관심이었을 뿐입니다. 만약 그때 전문적으로 배울 수 있는 환경이 있었다면, 전혀 다른 길을 걸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사소한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사람 안에는 저마다 하나님이 주신 고유한 관심과 성향, 그리고 부르심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가장 좋은 모습, 가장 온전한 형상으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로마서 8장 29~30절 말씀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미리 아셨고,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부르셨음을 보여줍니다. 그 목적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며 계획입니다.

창세기 1장 26~27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온 땅을 다스리게 하자.”

이 말씀은 인간 창조가 다른 피조물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빛과 어둠, 하늘과 땅, 생물들을 말씀으로 창조하셨지만, 사람만큼은 특별한 방식으로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은 흙으로 사람의 몸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살아 있는 존재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는 인간이 단순한 생물 이상의 존재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의 숨결이 사람 안에 들어갔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독특한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형상’은 히브리어로 첼렘(צֶלֶם, tselem), ‘모양’은 데무트(דְּמוּת, demût)라고 합니다. 이 두 단어는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본질과 성품, 그리고 그분을 대표하는 존재로서의 기능을 함께 포함합니다. 즉, 인간은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서 드러내는 대표자로 창조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에게 창조 세계를 다스리는 권한을 맡기셨습니다. 이는 인간이 피조물 중 하나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를 대리하는 존재로 세워졌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존귀한 존재라고 주장해서 존귀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지으셨기 때문에 존귀한 존재입니다.

이 사실을 잊어버릴 때, 인간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우리는 우연히 존재하게 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과 목적 가운데 창조된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형상과 모양대로 지으신 인간에게 안타까운 사건이 일어납니다. 바로 인간의 타락입니다. 로마서 3장 23절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음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에서 분명한 명령을 주셨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을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 약속을 어기고 그 열매를 먹었고, 그 결과 하나님의 형상은 심각하게 훼손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죽음’은 단순한 육체의 죽음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죽음을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 번째는 영적 죽음입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로 인해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의 거룩함과 의 안에 거할 수 없게 되었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육체적 죽음입니다. 아담 이후 인간의 수명은 점점 짧아졌고, 결국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는 죄의 결과로 인간 안에 들어온 사망의 역사입니다. 세 번째는 영원한 죽음, 곧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이는 상태입니다. 이는 단순한 소멸이 아니라, 영원한 단절과 심판을 의미합니다.

중요한 점은, 인간의 외형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사람의 모습은 그대로 남아 있었지만, 하나님의 생명과 거룩함, 의로움이라는 본질적인 요소가 파괴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인간은 자신이 누구인지, 왜 살아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성경이 말하는 정체성 상실의 근원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훼손된 이후, 인간은 근본적인 변화를 겪게 됩니다. 그것은 단순히 죄를 짓는 존재가 되었다는 차원을 넘어,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타락 이후의 인간은 늘 갈망 속에 살아갑니다.

사람들은 이 갈망을 채우기 위해 눈에 보이는 것들을 붙잡습니다. 돈, 성공, 명예, 지위, 인정받음, 지식 등이 그것입니다. 세상은 이것들을 통해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이 가지기 위해, 더 높은 자리에 오르기 위해 쉼 없이 달려갑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들을 얻는다고 해서 참된 만족이 오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성경 속 솔로몬 왕은 지혜와 부와 명예를 모두 가졌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인생을 돌아보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고백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것은 결국 사라지고, 아무것도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은 젊은 시절의 사람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너의 젊은 날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이는 늙어서 후회하지 말라는 단순한 조언이 아니라, 정체성을 바로 붙잡으라는 영적 권면입니다. 인간은 창조주를 떠나서는 자신의 존재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인간은 계속해서 세상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 애씁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되면, 더 이상 외적인 조건에 자신을 맡기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이 주는 자유이며, 회복의 시작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인간이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회복된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말씀에서 하나님은 미리 아신 자들을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다고 선포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아들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골로새서 1장 15절은 예수님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오,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라.”

예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눈에 보이도록 나타내신 분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이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이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가장 완전하게 보여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목적은 분명합니다. 죄로 인해 훼손된 하나님의 생명과 거룩함, 의로움을 회복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근본적인 문제는 바로 였기 때문에, 예수님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래서 성경 전체에는 예수님을 예표하는 희생 제사의 이야기가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출애굽기의 유월절 어린양, 레위기의 제사 제도는 모두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위해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려 왔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 없으신 분이었지만, 우리를 대신하여 죄가 되셨고, 십자가에서 저주받은 자로 죽으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받아야 할 심판과 저주를 대신 감당하신 사건이었습니다. 이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형상을 가로막고 있던 죄의 장벽이 무너졌고, 회복의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단순한 육체적 고통의 사건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십자가는 저주의 자리, 곧 인간이 받아야 할 모든 심판을 대신 감당하신 자리입니다.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는 말씀처럼, 십자가는 죄의 결과로 임하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그 자리에 서셨습니다. 우리가 감당해야 할 죄의 무게, 저주의 결과, 사망의 권세가 모두 예수님께 쏟아졌습니다. 육체의 고통도 극심했지만, 예수님이 감당하신 가장 큰 고통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단절, 곧 영적인 고통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셨습니다.

이 외침은 단순한 절망의 표현이 아니라, 인간이 죄로 인해 겪어야 할 영적 죽음을 예수님이 온전히 대신 겪으셨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심으로, 죄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셨습니다. 이는 더 이상 인간의 노력이나 공로로 구원을 얻을 필요가 없다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 이후, 그분은 사망의 권세 아래까지 내려가셨고, 마침내 부활하심으로 죽음을 완전히 이기셨습니다. 이 부활은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었음을 선포하는 사건입니다. 죄로 인해 훼손되었던 생명과 의와 거룩함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십자가는 패배의 상징이 아니라 승리의 표지이며, 저주의 자리에서 축복이 시작된 결정적인 순간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은 인간을 향한 자신의 사랑과 구원의 계획을 분명히 드러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이루어진 것은 단순한 죄 사함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정체성 자체가 회복된 사건입니다. 성경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선포합니다. 이는 과거의 실패, 죄, 상처, 저주가 더 이상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하지 못한다는 선언입니다.

우리는 흔히 과거에 묶여 살아갑니다. 집안의 문제, 반복된 실패, 관계의 상처, 혹은 스스로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우리를 붙잡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분명히 말합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다고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새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 은혜는 값없이 주어진 선물입니다. 인간의 노력, 선행, 헌신으로 얻어낸 결과가 아닙니다. 그래서 이것이 복음이며, 기쁜 소식입니다. 많은 종교가 인간의 수고와 조건을 요구하지만, 복음은 전혀 다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먼저 사랑하셔서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은혜는 사는 것이 아니라 받는 것입니다. 선물은 감사함으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내 것이 됩니다. 이 은혜를 깨달을 때, 사람은 참된 자유와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시는지를 알게 되면, 더 이상 세상의 기준에 나를 맞추지 않아도 됩니다.

이제 우리는 저주 아래 있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존귀한 자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다시금 자신의 모습을 이 땅에 드러내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회복된 정체성을 가진 사람의 삶입니다.

회복된 정체성은 단순히 ‘알고 있는 사실’로 머물지 않습니다. 그것은 삶의 태도와 선택을 바꾸는 힘이 됩니다. 우리가 누구인지를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은 전혀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존재라는 사실을 믿는 사람은 더 이상 과거의 상처나 실패에 사로잡혀 살지 않습니다.

사람은 흔히 자신의 연약함을 보며 스스로를 평가합니다. 외적인 조건, 성격, 과거의 실수, 반복되는 약점들을 보며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라고 단정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너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된 존재”라고 선언합니다. 이는 자기 암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하는 진리입니다.

한 배우가 주연을 맡으며 “나는 주연 배우다”라고 스스로를 인식하며 연기했다는 이야기처럼, 우리의 삶도 정체성에서 출발합니다. 우리가 여전히 옛 사람의 관점으로 자신을 바라본다면, 회복된 은혜를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나는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존재다”라는 믿음으로 살아간다면, 삶을 대하는 태도는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었다는 것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생명과 거룩함이 역사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는 곧 문제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고, 상황을 대하는 반응이 달라진다는 의미입니다. 삶의 어려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대하는 중심이 달라집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 속에 보내셔서 그분을 대표하는 존재로 살아가게 하십니다. 회복된 정체성은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드러내는 통로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살아가는 삶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5장 17절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이 말씀은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분명히 보여줍니다. 우리는 더 이상 사망과 죄가 지배하는 삶을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생명을 얻은 자로서, 삶의 자리에서 왕처럼 다스리는 존재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는 교만한 지배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통치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었다는 것은, 우리의 가정과 일터, 관계와 사회 속에서 하나님을 대표하는 삶을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두려움과 패배의식이 아니라, 은혜와 믿음으로 상황을 대면하는 삶입니다.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상황을 하나님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삶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과거에 매여 살 필요가 없습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고, 우리는 새 것이 되었습니다. 저주는 끊어졌고, 하나님의 생명과 신성이 우리 안에 임했습니다. 이 사실을 믿고 고백하며 살아갈 때, 우리의 삶은 점점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은 처음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의도하셨던 그 목적, 곧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살아가는 삶으로 우리를 다시 부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 우리는 이제 받은 은혜를 흘려보내며,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제 우리의 고백은 분명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재이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 하나님의 자녀다.”

이 믿음 위에 설 때, 우리는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