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본문
[요한복음 3장 22~20절]
22.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베푸시더라
23.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베푸니 거기 물이 많음이라 그러므로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
24.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
25.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과 더불어 정결예식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
26.그들이 요한에게 가서 이르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27.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28.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29.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30.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태도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천국의 시민권을 가진 자들입니다. 내가 어디에 속해 있고, 내가 어떤 존재인가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바르게 알고 인식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 삶에서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한 주간의 삶 속에서 지난주 말씀처럼, 나는 천국에 속한 자요 하나님의 나라에서 난 자라는 이 의식을 가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 영과 새 관점으로 살아보셨습니까?
우리가 삶을 살아가다 보면 좋은 일보다 그렇지 않은 일이 더 많을 때가 많습니다. 기쁘고 감사한 일이 있지만, 현실적으로 마주하는 문제는 우리의 마음을 혼란케 하고 생각을 무겁게 할 때가 있습니다. 또한 어느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결정해야 하는 상황도 많이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선을 행하지만 그 결과가 좋지 못하게 다가올 때도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연약한 인간이기에 실수하기도 하고, 그 실수가 우리 마음을 짓누르고 억압하는 일로 다가올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 속에서도 우리가 반드시 붙들어야 하는 의식이 있다면, 바로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과 ‘내가 속한 나라는 하늘나라’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땅 위에 살지만, 계속 땅의 것에 주목하면 그 영향에 매여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기준이 되어 생각하고 바라보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모든 사람은 성공하는 인생을 살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그 성공을 위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바로 ‘태도’입니다. 성공이란 무엇일까요? 성공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성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돈을 많이 벌면 성공한 인생입니다. 어떤 사람은 명예를 얻는 것이 성공이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명예를 얻으면 성공한 인생입니다. 어떤 사람은 성공이란 그저 매일 즐겁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하루를 즐기며 살았다면 그는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에 가치를 두느냐에 따라, 무엇을 성공으로 보느냐에 따라 기준은 달라집니다.
어떤 사람은 자녀들을 잘 키우는 것이 성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자녀를 잘 양육했다면 그는 성공한 인생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선생님이 되는 것이 성공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선생님이 되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나는 성공했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성공의 기준은 다 다릅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그것을 이루고, 또 어떤 사람은 이루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나중에 삶을 돌아보며 “그래도 나는 잘 살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내가 바라보았던 삶의 목표를 향해 달려갔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진 ‘성공의 기준’은 세상과 같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가진 진정한 성공은, 하나님께서 나를 향해 가지신 계획, 나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그 뜻이 나타나는 삶입니다. 그것이 진짜 성공한 인생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에 소원을 두고 행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삶에 주어진 부르심을 이루고,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열매가 나타나는 것이 진정한 성공입니다.
이 일을 가능하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 생명의 말씀, 이 복음의 말씀이 그 역할을 합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가장 높은 우선순위가 되어야 합니다.
모든 결정과 선택의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단지 말씀만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부족하고 판단이 흐려질 수 있음을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저와 여러분 안에 성령님이 계십니다. 그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시며,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시고, 생각나게 하시고, 무엇이 옳은 것인지 판단하도록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성령님의 은혜를 통해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성공하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삶 속에서 ‘선한 영향력’으로 드러납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여러분,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사랑하십시오.
말씀을 더욱 붙잡으십시오.
말씀을 깊이 묵상하십시오.
그리고 그 말씀이 믿음으로 자리 잡을 때까지 쫓고, 구하고, 바라보십시오.
성령님의 도우심과 말씀의 기준 안에서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이루어가는 삶으로 이끌림을 받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공하는 인생이며,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이끄시는 삶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태도’입니다.
태도란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 그리고 “말로 의사를 전달하는 방식”입니다. 말과 행동이 드러나는 것, 그것이 바로 태도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오며 수없이 느꼈던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태도는 정말 중요합니다. 어떤 말도, 내용 자체는 옳을 수 있지만 전달하는 태도가 바르지 않으면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옳은 말인데도, 상대를 존중하거나 배려하는 태도가 아니라면 그 말은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관계에 갈등이 생기고 마음이 멀어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내용이 동일해도 올바른 태도를 가지고 말하면 전혀 다른 결과가 일어납니다. 듣는 사람이 바른 태도를 가지고 듣지 않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대방의 마음이 삐뚤어져 있으면, 좋은 말도 오해로 받아들이고 상처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가 우리 삶에 참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은 이런 갈등이 생기면 자기 자신을 먼저 돌아보기보다는 다른 사람에게서 이유를 찾고 책임을 전가하려고 합니다. “저 사람이 잘못했다”, “저 사람이 먼저 그런 태도를 보였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잘못된 태도입니다.
그러므로 갈등이 생겼을 때는 반드시 ‘내가 먼저’ 돌아보아야 합니다.
말하는 내가 그럴 수도 있고, 듣는 내가 그럴 수도 있습니다. 어느 경우든 먼저 나 자신을 점검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본받아야 할 태도가 있다면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성경에서 가르치는 태도입니다.
어떤 문제를 대하는 태도에 따라 결과는 완전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때로 사람들은 자신이 태어난 환경, 자라온 배경, 과거의 상처 등을 이유 삼아 스스로를 제한하기도 합니다. “나는 이런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어쩔 수 없어”, “내가 어린 시절 이런 상처를 받았기 때문에 지금 이런 행동밖에 할 수 없어”라고 말하면서 과거와 환경에 계속 책임을 전가합니다. 이것이 바로 ‘피해자 의식’입니다.
이러한 태도를 가진 사람은 늘 불만을 품게 되고, 사람을 탓하고, 환경을 탓하고, 관계가 성장하지 못합니다. 좋은 관계를 만들어가지 못하고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점점 퇴보하게 됩니다. 결국 이런 태도 속에서는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선한 영향력과 성공을 온전히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태도는 매우 중요합니다.
문제가 왔을 때 내가 그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다른 사람까지도 그 무게를 느낍니다. 내가 심각하게 받아들이면 다른 사람도 심각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내가 믿음으로 “이것도 지나간다”, “하나님 안에서 충분히 해결될 수 있다”라고 반응하면, 다른 사람도 그렇게 봅니다.
삶의 문제는 때로는 크게 보일 수도 있고, 작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의 ‘크기’가 결과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문제를 대하는 나의 태도가 결과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경적인 태도가 어떤 열매를 만들어내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예를 들어 손흥민 선수를 보십시오.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사람이죠. 그는 영국에서, 그리고 최근 미국에서도 뛰어난 활약을 보이며 토트넘에서 레전드로 인정받는 선수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존중하고 높이는 이유는 단순히 축구 실력 때문만이 아닙니다. 그의 태도 때문입니다.
손흥민은 동료를 존중하고 팀을 먼저 생각하는 태도를 보여줍니다. 이번에 LA로 이적했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과정 속에서 손흥민 효과가 엄청나게 나타났습니다. 그곳에서도 그는 자연스럽게 자신과 호흡을 맞출 파트너를 만나게 되었는데 어느 경기에서 손흥민에게 해트트릭을 만들 기회가 있었습니다. 페널티킥을 얻었기 때문에 본인이 차면 해트트릭을 완성할 수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손흥민은 그 찬스를 동료에게 양보했습니다.
동료가 물었습니다. “왜 양보합니까? 당신이 직접 차면 해트트릭인데.”
그러자 손흥민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해트트릭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기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당신이 나보다 더 잘 찰 수 있지 않습니까.”
그 말 한마디, 그 태도 하나에 그 선수는 감동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팀이 더 하나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엄청난 시너지와 영향력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감동하고, 그 감동 때문에 팬이 됩니다.
결국 태도가 만들어낸 열매입니다.
그래서 태도는 우리의 삶을 성공으로 이끄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사람들은 그의 능력도 보지만, 결국은 ‘그 사람이 가진 태도’에서 감동을 받습니다. 태도는 선한 영향력을 만들어냅니다.
오늘 성경 속 등장 인물을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문에는 세례 요한이 등장합니다. 세례 요한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오심을 예비한 광야의 외치는 자, 주의 길을 준비한 선지자입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 대해 이렇게 칭찬하셨습니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 (누가복음 7장 28절)
예수님께서 이런 칭찬을 하셨습니다. 여자가 낳은 사람들 중에서 세례 요한보다 큰 자가 없다 — 얼마나 큰 칭찬입니까. 그런데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저와 여러분이 바로 그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자들입니다.
할렐루야.
왜 그렇습니까?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 이전 시대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과 연합된 존재입니다. 비교할 수 없는 차원의 자격과 신분을 가진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의 시민권을 가진 우리 안에 성령 하나님이 계시고,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나 되었습니다. 이것이 차원의 차이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이전 시대에서 세례 요한은 가장 큰 자였지만, 천국 안에서는 가장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다고 설명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난 존재입니다. 할렐루야. 이것이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우리는 비교할 수 없는 하늘의 차원에 속한 자들입니다.
이제 본문으로 돌아가 보면, 세례 요한의 태도가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베푸시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가까운 곳에서 요한도 세례를 베풀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세례와 정결 예식에 대한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유대인들은 ‘정결 의식’을 이미 전통적으로 알고 있었고, 물을 뿌리고 씻는 여러 방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물에 ‘잠근다’는 방식으로 회개의 세례를 베풉니다.
그래서 이 부분이 논쟁의 대상이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보니, 예수님께서도 같은 방식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요한에게 말합니다. “선생님, 사람들이 모두 그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마치 원조 가게 옆에 새 가게가 생겼는데, 사람들이 죄다 새 가게로 몰리는 것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이 상황을 세례 요한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여기서 ‘태도’가 드러납니다.
그가 이렇게 말합니다.
“하늘에서 주신 바가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이 말은 자신이 사람의 기준으로 경쟁하고 비교하는 자리에 서 있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하늘에서 주신 것이 아니면 받을 수 없으며,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 속한 일이라는 고백입니다.
세례 요한은 인간적인 감정으로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시각으로 보면 “우리가 먼저였는데”, “저쪽이 더 잘되니까 억울하다”, “사람들이 다 빼앗겼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바로 그 관점으로 반응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달랐습니다. 그는 자신의 위치와 역할을 ‘하나님 안에서’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고,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
다시 말해,
“나는 원래 주인공이 아니다. 나는 길을 준비하는 사람이다.”
라는 태도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요한은 자신이 친구의 위치임을 기뻐했습니다.
자신이 spotlight를 받는 자리가 아니어도 괜찮다는 태도입니다.
자기 역할을 기쁨으로 받아들인 태도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문장이 나옵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이것이 성경적인 태도의 정수입니다.
“내가 줄어들어도 괜찮다. 그분이 드러나면 된다.”
이 태도 속에 자유가 있습니다. 이 태도 속에 믿음이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누군가는 눈에 띄고, 누군가는 조연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위치에서 내 역할을 다할 때 모두가 빛난다는 것입니다. 나의 자리를 떠나 다른 사람의 위치를 탐하거나, 비교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면 결국 아무도 행복하지 못합니다. 만족이 사라지고, 기쁨이 사라집니다.
중요한 것은 —
내가 누구인가, 하나님이 나를 어떤 위치에 두셨는가를 알고, 그 자리에서 올바른 태도를 가지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보고 낙심하거나
“나는 저 자리가 아니니까 가치가 없다”
라고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다른 자리를 보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나를 보라’고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을 주셨고, 성령을 주셨고, 나를 통해 어떤 일을 이루기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태도를 가지고 삶을 대하느냐, 어떤 태도를 가지고 관계를 대하느냐 입니다.
우리는 종종 다른 것 때문에 변명합니다.
다른 사람, 다른 상황, 다른 환경을 탓합니다.
그러다 보니 정작 ‘내 자리에서 누릴 기쁨’을 잃어버립니다.
성경에 보면 ‘하만’이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하만은 당시 나라에서 가장 높은 자리 가운데 하나를 가진 자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에게 엎드려 경배했습니다. 모두가 그의 위치를 인정했고, 그를 높였습니다. 그런데 단 한 사람 — 모르드개가 그에게 절을 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 한 사람 때문에 그는 분노했고, 마음이 뒤틀렸습니다. 그리고 결국 이 한 사람에 대한 분노가 극도로 커져, 모르드개뿐 아니라 유대인 전체를 말살하려는 계획까지 세우게 됩니다.
무엇입니까?
수많은 인정과 높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단 하나의 거절 앞에서 그 마음이 무너졌습니다. 이것이 교만의 태도입니다.
그러나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은 그 교만을 치셨습니다.
결국 그가 계획했던 그 함정에 자신이 달려들어 멸망했습니다.
우리가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을 수는 없습니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 우리는 자꾸 ‘나를 싫어하는 한 사람’에 더 집중하려 합니다.
그것 때문에 마음이 무너지고,
그것 때문에 열매를 잃고,
그것 때문에 기쁨을 잃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교만한 자를 하나님이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벧전 5:5)
그러므로 태도는 생명입니다.
태도는 방향을 정합니다.
태도는 결과를 바꿉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그분이 너희를 높이시리라.” (벧전 5:6)
여기서 핵심은 이것입니다.
때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살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같이 출발했는데 저 사람은 더 앞서가네.”
“왜 저 사람은 하는 것마다 잘 풀리지?”
“나는 왜 제자리인가?”
이럴 때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태도입니다.
겸손한 태도, 존중하는 태도, 믿음을 붙드는 태도 —
그 태도를 가진 사람은 하나님이 높이십니다.
토끼가 아무리 빨리 뛰어도 도중에 쉬면 거북이가 이깁니다.
속도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때’가 중요한 것입니다.
늦는다고 늦은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높이시는 ‘그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이가 들었다고, 시간이 흘렀다고, 이미 늦었다고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아직 끝내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어떤 태도로 내 삶을 대할 것인가, 어떤 태도로 관계를 바라볼 것인가를 붙들어야 합니다.
예수님 또한 이런 태도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창조주이십니다.
태초부터 계셨던 말씀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말씀이 없이는 아무것도 지어진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낮아지심입니다.
빌립보서 2장 7절 말씀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자기를 비우셨고, 종의 형체를 입으셨습니다.
그리고 어디까지 낮아지셨습니까?
십자가 — 저주의 자리까지 낮아지셨습니다.
세상 누구도 저주받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모두는 축복을 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저주의 자리까지 내려가셨습니다.
죽음의 자리까지 내려가셨습니다.
음부까지 내려가셨습니다.
그 낮아짐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를 다시 가장 높은 이름으로 높이셨습니다.
예수님은 낮아지셨습니다. 그런데 그 낮아지심으로 인해 우리가 높아졌습니다.
우리는 종의 자리에서 아들의 자리로 옮겨졌습니다.
저주의 자리에서 축복의 자리로 옮겨졌습니다.
병듦과 연약함에서 신성한 건강의 자리로 옮겨졌습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
예수님이 낮아지셨기 때문에 우리가 높아졌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말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예수님은 자신이 낮아질 때,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실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기쁨으로 그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통해 우리에게 드러날 회복과 구원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그 결과를 바라보며, 그 마음을 품고 나아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매이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이 말하는 것, 세상 기준에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진정한 위대함은 자기를 낮추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셨습니다.
그 태도를 본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높이시고, 교만한 자를 대적하십니다.
하나님은 때가 되면 반드시 높이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어떤 태도를 가지느냐는 단순한 ‘성품 문제’가 아니라
우리 인생의 방향과 고도(高度)를 결정하는 문제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경에서, 예수님에게서, 그리고 예수님이 칭찬하신 사람들 속에서
올바른 태도가 어떤 열매를 만드는지 확인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쁜 태도는 십자가 앞에 내려놓고,
옳은 태도를 취해야 합니다.
태도는 결과를 바꿉니다.
태도는 인생을 바꿉니다.
태도는 하나님이 일하실 수 있는 자리를 여는 문입니다.
내가 어떤 태도를 가지고 오늘의 삶을 대하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머물기도 하고,
혹은 그 은혜가 흐르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일은 나의 태도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세우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나라를 통해 나타나기를 원하시는 선한 영향력과 열매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삶을 대하는 태도는 단순히 분위기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당신을 통해 이루기를 원하시는 일을 가로막느냐, 혹은 열어놓느냐의 문제입니다.
주님 앞에서
낙심하거나, 좌절하거나, 절망하거나,
마음이 무너지는 상태에 오래 머물러 있지 마십시오.
예수님을 보십시오.
그분이 낮아지셨기에 오늘 우리가 높아졌습니다.
그분이 비워내셨기에 오늘 우리가 채워졌습니다.
그분이 저주의 자리에 서셨기에 우리가 축복의 자리에 섰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시선은 상황이 아니라 예수님을 향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조건이 아니라 주님의 성품과 태도를 따라야 합니다.
진정한 위대함은 높임을 받는 데 있지 않고,
자기를 낮출 수 있는 태도 속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이 태도에 대한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높이십니다.
하나님은 그때가 되었을 때, 그 사람의 삶을 들어 올리십니다.
오늘 여러분의 태도가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에 일하시기 위한 ‘통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태도를 통해
여러 사람들에게 선하고 아름다운 영향력이 흘러가기를 바랍니다.
삶을 돌아볼 때,
“참 잘 살았다”,
“수고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길은
– 가진 것이 많아서가 아니라,
– 칭찬을 많이 들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태도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오늘 나의 태도를 붙드소서.
나의 마음과 생각과 말과 행동이 주님 닮은 태도가 되게 하소서.”
말씀을 들을 때도 태도,
사람을 대할 때도 태도,
결정을 내릴 때도 태도,
상황을 해석할 때도 태도입니다.
태도는 ‘결정의 순간’에 드러납니다.
그리고 그 태도가 바로 우리 인생의 방향을 잡습니다.
오늘 나의 태도는
하나님이 높이시기 원하시는 태도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대적하실 태도입니까?
이 질문을 마음에 새기고 살아갈 때
우리의 삶은 분명히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머무는 태도,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태도,
성령이 일하실 수 있는 태도를 선택하십시오.
그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그 속에서 ‘성공한 인생’이 시작됩니다.
마무리
인생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태도’이며, 올바른 태도는 믿음과 겸손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환경 때문에 실패하는 것이 아니라, 그 환경을 대하는 태도 때문에 방향이 바뀝니다. 세례 요한처럼 — spotlight가 자기에게서 떠나는 상황에서도,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라고 고백할 수 있는 태도, 예수님처럼 —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비우고 낮추실 수 있는 태도, 바로 그 태도가 하나님이 높이시는 태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교, 시기, 피해자 의식에 머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자리, 하나님이 주신 말씀, 성령이 이끄시는 방향 안에서 겸손과 믿음의 태도를 선택해야 합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높이십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의 태도는 내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실 길을 여는 ‘통로’입니다. 이것이 성경적 성공이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생의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