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본문

[디모데후서 4:1~8]

1.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2.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3.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4.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5.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6.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7.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영원한 면류관을 바라보십시오

오늘은 “영원한 면류관을 바라보십시오”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무엇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하는가, 우리의 시선은 매우 중요합니다.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마치 경주와 같습니다. 각 사람마다 그 경주 속에서 목표로 삼는 지점들이 있습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그것은 명예일 수도 있고, 권력일 수도 있으며, 때로는 돈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성공’이라고 부르며, 잘되는 인생을 바라보며 힘을 다해 달려갑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결국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것들입니다. 겉으로는 큰 영광과 성공이 있는 것 같지만, 결국 허무하게 사라지고 마는 것이죠.

그래서 성경은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바로 영원한 것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원한 면류관을 향해 달려가라는 것이지요. 오늘 우리는 이 영원한 면류관에 대해 성경을 살펴보면서, 우리의 인생 여정 속에서 무엇을 바라보고 또 어떤 소망 가운데 살아가야 할지를 함께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면류관이라는 것은 단순히 머리에 쓰는 장식품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신분과 정체성을 나타내며, 마지막 날에 우리에게 주어질 영원한 상급을 상징합니다.

오늘 본문, 특별히 디모데후서 4장 1절에서는 ‘의의 면류관’이 언급되는데요. 구약에서 면류관을 가리키는 히브리어는 ‘아타라(עֲטָרָה)’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왕이나 제사장, 혹은 신부에게 씌워주는 관을 뜻하며, 하나님의 선택과 영광을 표현합니다. 반면 신약에서는 ‘스테파노스(στέφανος)’라는 단어를 쓰는데, 이는 승리와 영광의 관을 의미합니다.

즉, 구약적 의미에서 면류관은 하나님의 선택과 신분을 나타내고, 신약적 의미에서는 승리와 영광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면류관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속한 것, 곧 우리의 정체성과 승리에 대한 영광스러운 상급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또 하나의 면류관을 떠올리게 됩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쓰셨던 가시 면류관입니다. 로마 병사들은 가시로 만든 관을 예수님의 머리에 씌우며 “유대인의 왕”이라는 푯말을 붙였지만, 그것은 진정한 왕으로서 인정한 것이 아니라 조롱과 수치의 상징이었습니다. 날카로운 가시는 예수님의 살을 찌르고 피를 흘리게 했으며, 본래 사람에게 씌워져서는 안 될 고통스러운 관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수치와 조롱의 관을 끝까지 감당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와 조롱, 수치, 질병, 고통, 죽음, 사망을 예수님께서 대신 담당하신 자리였습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와 저주를 대신 지셨고, 그 자리를 통해 우리에게는 승리와 영광의 관을 주신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쓰신 관은 조롱과 수치의 관이었지만, 그분의 희생으로 인해 우리에게는 영원한 승리와 영광의 면류관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모든 조롱과 수치, 그리고 저주까지 다 감당하셨습니다. 그분이 그렇게 모든 것을 짊어지신 이유는, 값없이 주시는 놀라운 은혜를 저와 여러분에게 선물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 안에는 더 이상 조롱과 수치가 남아 있지 않습니다. 할렐루야!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조롱하거나 비난한다고 해서 수치심을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혹은 삶에서 원하는 결과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이유로 누가 비웃는다 해도, 그 조롱과 수치는 이미 예수님께서 다 짊어지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자리에 무엇을 주셨습니까? 승리의 면류관을 우리에게 되돌려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승리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존재입니까? 문제를 이긴 자, 승리자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최고의 걸작품으로 지음 받은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조롱과 수치의 자리에서 건져내셔서, 영광과 자랑의 자리로 드러내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시 면류관을 쓰셨던 그 장면을 떠올릴 때마다, 그분이 당하신 수치가 곧 우리의 영광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것처럼, 성경에는 여러 가지 의미의 면류관이 나옵니다. 이제 그 의미들을 하나씩 살펴보면서, 다시 한 번 우리가 믿음 안에서 이 땅의 삶을 어떻게 바라보고 살아가야 하는지 점검하며, 소망 가운데 믿음으로 붙잡기를 원합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쓰셨던 가시 면류관이 있다면, 성경은 또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승리와 영광과 상급의 면류관을 약속합니다. 그 가운데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것이 바로 의의 면류관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하나님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즉,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말씀을 전파하는 자, 말씀을 알리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세가 될수록 사람들은 바른 교훈을 받으려 하지 않고, 자기 귀에 듣기 좋은 스승을 따르며 헛된 이야기를 좇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당부합니다.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고,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그러면서 바울은 자신의 고백을 전합니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여기서 말하는 전제(奠祭)는 제사를 드릴 때 포도주를 전부 쏟아 부어 드리는 제사로, 전적인 헌신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삶이 바로 그러한 헌신의 삶이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며, 끝까지 믿음을 지켰기에 이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의의 면류관을 바라보게 되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는 하나님께서 부르신 달려가야 할 길이 있습니다. 할렐루야! 각자에게 주어진 길은 서로 다릅니다. 바울은 자신이 달려가야 할 길을 알았고, 그 길을 위해 끝까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웠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 일을 마치고 주님 앞에 설 때가 되었음을 고백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게 남아 있는 피 한 방울까지라도 다 쏟아 하나님께 드렸다. 나에게 맡겨주신 일을 믿음의 선한 싸움을 통해 끝까지 이루었고, 수많은 방해와 어려움 속에서도 믿음을 지켰다. 그러므로 이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다.”

오늘 우리 역시 바울의 이 고백을 마음에 새기며, “나에게 달려가야 할 길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내 인생에 맡기신 일은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나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영역, 그 사명이 무엇인지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운다는 것은 단순히 편안히 걷는 길이 아니라, 수많은 도전과 방해를 믿음으로 이겨내며 맡겨진 일을 이루는 삶을 의미합니다. 바울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길이 있었던 것처럼, 우리 각자에게도 하나님 나라를 위해 반드시 감당해야 할 길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길을 끝까지 달려 마쳤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의의 면류관을 예비하셨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젠가 주님 앞에 서게 될 그날을 바라보며, 하나님께서 맡기신 길을 끝까지 달려가야 합니다.

결국 의의 면류관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올바른 길을 끝까지 걸어갔다는 증거입니다. 할렐루야!

우리 역시 부족하고 연약한 부분이 많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그 올바른 길이 무엇인지 한 번쯤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 길을 분별하며 믿음의 싸움을 싸우는 태도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오늘 말씀을 돌아보면서, 나의 달려갈 길은 무엇인지, 그리고 내 삶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묵상하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사도 바울처럼 모두가 선교지로 떠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부르심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일을 내 삶의 자리, 작은 것부터 시작해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작은 일에 충성할 때, 하나님께서 더 큰 일로 이끌어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충성된 삶이며, 끝까지 믿음을 지켜 받을 의의 면류관입니다.

고린도전서 9장 24–25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운동장에서 다름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다름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세상의 사람들도 썩어질 영광과 성공을 위해 절제하며 땀 흘려 달려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추구하는 면류관은 썩을 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썩지 아니할 영원한 면류관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다름질하라.”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고 신앙생활을 할 때, 성경이 말하는 이 관점을 반드시 한 번쯤은 깊이 생각해 보고 삶에 적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은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바로 승리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승리와 성공, 썩어질 관을 얻기 위해 자신을 절제하고 노력하며 열심히 살아갑니다. 마치 달리기 경기에서 단 한 사람만이 결승선을 통과해 금메달을 받는 것처럼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도전합니다. “너희도 상을 받을 자처럼 달려가라.”

할렐루야! 여기서 첫 번째로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반드시 받을 상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땅에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이루며 달려갈 때, 그 수고를 결코 헛되게 하지 않으십니다.

신앙생활의 경주는 목적 없는 달리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일을 이루어 드리는 삶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길을 달려간 자들에게 썩어질 관이 아니라, 썩지 아니할 영원한 면류관을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은 단순히 흘러가는 삶이 아니라 믿음의 경주입니다. 때로는 단거리 같을 수도 있고, 때로는 마라톤처럼 길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끝까지 완주하여 승리의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순히 “예수님을 믿는다”는 차원을 넘어, 바울이 고백했던 것처럼 더 큰 시선을 가져야 합니다. 바로 승리자에게 주시는 영광, 하나님께서 반드시 갚아주실 상급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 땅에서도 단순히 믿음의 삶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이들이 있고, 또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헌신하며 수고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그들에게 주어지는 상급은 다르다. 하나님은 그 헌신과 믿음을 기억하시고 반드시 합당하게 갚아 주십니다.

이제 야고보서 1장 1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뎌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여기서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다고, 그리고 시련을 견뎌낸 자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게 된다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게 됩니다. 때로는 그것이 단순한 어려움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인내와 믿음의 싸움으로 이겨내야 할 시련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그 시험 때문에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고, 좌절과 절망에 빠지거나 주저앉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합니다. “견디어 낸 자가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시련을 당할 때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요?
첫째,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할렐루야! 소망이 있기에 우리는 견딜 수 있습니다. 소망이 없다면 그 어떤 어려움도 버텨낼 수 없을 것입니다. 때로는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시험이 찾아올 수 있지만, 성경은 “감당하지 못할 시험은 허락하지 않으시고, 피할 길을 주신다”라고 말씀합니다. 또 때로는 그 자리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소망 가운데 인내해야 하는 상황도 있습니다.

둘째, 믿음으로 인내하는 훈련의 과정임을 알아야 합니다.
믿음의 시험과 시련은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인내를 배우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사람으로 훈련하시기 위한 과정입니다. 따라서 믿음의 시련이 올 때 그것을 믿음의 싸움으로 알고 견뎌낸다면, 우리는 오히려 그 과정을 통해 더 단단하게 세워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마십시오.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러한 시련을 끝까지 이겨낸 자에게 하나님께서 생명의 면류관을 주실 것이다. 이 생명은 단순한 생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이며, 이미 우리가 받은 생명을 최종적으로 확증하는 상급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 관을 씌우심으로, 우리의 믿음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거하실 것입니다.

이번에는 데살로니가전서 2장 19–20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여기서 성경은 자랑의 면류관에 대해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이 자랑의 면류관은 무엇입니까? 바로 복음을 전하여 세워진 영혼들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서 참된 영광과 기쁨으로 자랑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복음을 전해 예수님을 믿게 되고 세워진 영혼들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을 전하는 일을 주저하지 마십시오. 듣든지 아니든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우리는 항상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통해 구원받은 이들이야말로 자신의 자랑의 면류관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나는 과연 복음을 전하여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 말씀으로 세워진 사람, 다시 말해 나의 자랑의 면류관이라 부를 수 있는 열매를 가지고 있는가? 과거에 있었다면, 지금도 또 앞으로도 계속 있어야 할 것입니다. 만약 복음을 전하는 일에 무관심했다면, 이제는 우리의 태도를 바꿔야 합니다.

이 마지막 때에, 우리는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작은 말 한마디라도 예수님을 전해야 합니다. 왜 사람들이 믿지 못합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놀라운 일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복음을 들어야 믿음이 생기고, 믿음이 있어야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말씀 앞에서 우리를 점검해 봅시다.
나는 영혼 구원을 위해 얼마나 기도해 왔는가?
복음을 얼마나 전하고 가르쳤는가?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은혜를 얼마나 증거해 왔는가?

만약 너무 오래 복음을 전하지 못하고 지내왔다면, 이제 다시 마음을 새롭게 하십시오. 사도 바울이 “너희는 우리의 자랑이요 기쁨이니라”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우리도 주님 앞에 자랑할 수 있는 영혼 구원의 열매를 맺어가는 삶을 살아가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단순히 썩어질 영광이나 사라질 면류관을 위해 사는 곳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영원한 면류관입니다. 그런데 이 영원한 면류관 가운데 우리가 반드시 가져야 할 자랑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을 전하여 구원받은 영혼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하나님의 사랑과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자유케 하시며, 생명을 주시기 위해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를 전하십시오. 그 복음을 듣는 이들 가운데 구원을 얻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물론 사람마다 반응은 다릅니다. 어떤 이들은 아직 마음이 굳어 있어 쉽게 열리지 않지만, 누군가는 이미 누군가의 기도와 씨뿌림을 통해 준비되어 있어 바로 예수님을 영접하기도 합니다. 전도를 하다 보면 그렇습니다. 내가 전한 말씀이 당장은 열매로 나타나지 않을 수 있지만, 누군가 기도하고 씨를 뿌리고 또 다른 누군가가 물을 줄 때, 하나님께서 결국 자라게 하십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주저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내가 직접 영접시키지 못했다고 해서 내 열매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 과정 속에서 내가 씨를 뿌렸거나 물을 주었다면, 그것 역시 귀한 역할입니다. 결국 모든 과정은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것이며, 우리는 그분의 손에 쓰임 받는 도구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혼 구원을 위해 기도해야 하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도 자랑의 면류관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어떤 이는 100% 열매를 맺는 일에 쓰임 받을 수도 있고, 어떤 이는 작은 부분을 감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의 몫을 충성되게 감당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도할 때마다 영혼 구원과 회복을 위해 기도하시고, 삶 속에서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복음을 전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것이 결국 우리의 자랑의 면류관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이제 베드로전서 5장 2~4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

이 말씀은 교회의 지도자들, 장로들과 목회자들에게 주어진 명령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메시지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영적으로 성숙해질 때, 단순히 자라나는 어린아이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영적 부모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성숙한 자는 반드시 목자의 역할, 곧 다른 영혼을 돌보고 양육하는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성경은 바로 그런 자들에게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이 예비되어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하며, 계시록 4장 10절을 읽어봅니다.
“24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새세토록 살아계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이르되…”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면류관과 상급은, 다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지만, 그 모든 것이 다시 하나님께 올려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의 인생을 큰 그림으로 한번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며,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오늘 이 면류관은 단순히 장식이 아니라, 우리의 정체성과 마지막 날에 받게 될 영광의 상급을 의미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눈앞의 일들에 마음을 빼앗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시선을 들어, 내가 걸어가야 할 인생의 길,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사명을 다시 점검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 우리가 달려갈 길을 다 마쳤을 때 주님 앞에서 받게 될 영원한 상급, 영원한 면류관을 소망하시길 바랍니다.

그 소망 가운데 오늘도 믿음의 선한 싸움을 담대히 싸워가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나눔 질문

  1. 우리는 종종 명예, 권력, 돈 같은 ‘썩어질 관’을 목표로 달려가려 합니다.

    👉 지금 내 삶에서 내가 바라보고 있는 목표는 무엇이며, 그것이 영원한 면류관과 어떻게 비교될까요?

  2. 예수님은 조롱과 수치의 가시 면류관을 쓰셨습니다.

    👉 나의 삶에서 ‘수치와 조롱’처럼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을 예수님이 대신 감당하셨다는 사실이 어떤 힘을 주나요?

  3. 사도 바울은 “믿음을 지켰다”라고 고백하며 의의 면류관을 바라보았습니다.

    👉 지금 내가 지켜야 할 믿음의 자리,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길은 무엇일까요?

  4. 성경은 시련을 견뎌낸 자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약속합니다.

    👉 최근 내가 경험한 시험과 시련은 무엇이었으며,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 나에게 가르치신 인내의 교훈은 무엇이었나요?

  5. 데살로니가전서 말씀처럼 우리의 자랑의 면류관은 복음을 전해 세운 영혼입니다.

    👉 지금 나에게 ‘자랑의 면류관’이라 부를 수 있는 영혼은 있는지, 앞으로 누구를 위해 기도하며 복음을 전해야 할까요?

 

마무리

결론적으로, 우리가 이 땅에서 추구해야 할 것은 잠시 있다 사라지는 세상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면류관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시 면류관을 쓰시며 조롱과 수치를 감당하신 것은 우리에게 승리와 영광의 면류관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처럼 맡겨진 길을 끝까지 달려가며 믿음을 지키고, 시험과 시련 속에서도 인내하며, 복음을 전해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그리할 때 주님 앞에서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 자랑의 면류관을 받게 될 것이며, 그 모든 상급은 결국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도구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