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본문
[누가복음 2:8~14]
8.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9.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10.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13.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14.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기쁨의 소식 구주가 나셨습니다
성탄절, 기쁨의 소식이 시작된 날
성탄절 하면 무엇이 가장 먼저 떠오르십니까?
아이들에게 물어보면 대부분 “산타클로스”라고 말합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선물 때문입니다. 언제 산타클로스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느냐고 물으면, 요즘 아이들은 “엄마가 쿠팡으로 주문한 선물을 보고 알았다”고 말합니다. 예전에는 양말을 걸어두고 산타를 기다렸지만, 이제는 택배가 그 비밀을 알려줍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성탄절이 여전히 우리 마음을 기쁘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왜일까요? 성탄절은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날을 기념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믿는 사람뿐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에게도, 성탄절은 왠지 모르게 기쁨과 설렘이 있는 날입니다.
그렇다면 성탄절은 언제부터 지켜졌을까요? 사실 성경에는 예수님의 정확한 탄생 날짜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성탄절은 성경에 없는 절기”라고 말하며 부정적으로 보기도 합니다. 실제로 초대교회 약 300년 동안은 성탄절을 따로 기념하지 않았습니다. 교회의 관심은 오직 십자가와 부활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를 위해 오신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해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인식이 생기기 시작했고, 4세기 초 이집트의 기록에서 성탄절을 1월 6일부터 7일까지 기념했다는 흔적이 나타납니다. 이후 로마 제국 시대를 거치며, 이교도의 태양신 축제일이었던 12월 25일이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로 정해졌고, 그 전통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성탄절이 복음이 되는 이유
12월 25일이 이교도의 축제일이었다는 사실 때문에 성탄절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보면, 우상을 숭배하던 날이 예수 그리스도를 기념하는 날로 바뀌었다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변화입니다. 믿고 믿지 않음을 떠나, 성탄절이 되면 전 세계 사람들이 한 번쯤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날”을 떠올리게 됩니다. 부활절은 잘 몰라도 성탄절은 기억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성탄절은 단순한 문화 행사가 아니라, 복음이 자연스럽게 세상 가운데 스며드는 날입니다. 사람들은 선물을 주고받고,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인사하며 기뻐합니다. 그 기쁨의 근원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몰라도, 그날의 중심에는 예수님의 오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탄절은 복음을 전하기에 가장 열린 날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목자들은 밤에 양 떼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 평범한 일상의 자리에서 주의 사자가 나타났고, 하나님의 영광이 그들을 비췄습니다. 그 광채 앞에서 목자들은 크게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천사는 말합니다. “무서워하지 말라.”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
이 ‘좋은 소식’이 바로 복음입니다. 복음은 단순히 기쁜 이야기가 아니라, 너무 좋아서 믿기 어려울 정도로 놀라운 소식입니다. 마치 로또 1등에 당첨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처럼, 믿어지지 않지만 사실이라면 인생이 바뀌는 소식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보다 훨씬 큽니다. 돈이 아니라 생명에 관한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천사는 말합니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예수님은 단순한 위인이 아니라 ‘구주’, 곧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것이 성탄이 기쁨의 소식이 되는 이유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기적
성탄이 왜 이렇게 큰 기쁨의 소식이 되는지에 대한 핵심은, 예수님의 ‘정체성’에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절부터 3절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태초부터 계셨던 분,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 바로 ‘말씀’이시며,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장 14절은 놀라운 선언을 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심에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성탄은 단순히 위대한 인물이 태어난 날이 아닙니다. 창조주 하나님이신 말씀이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사건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적이며, 하나님만이 행하실 수 있는 은혜의 역사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구약의 예언을 따라 이루어졌고, 동방 박사들과 목자들, 그리고 시므온과 같은 믿음의 사람들에 의해 증언되었습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인간의 씨로 태어나실 수 없었고,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통해 성령으로 오셨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참 사람이 되셨습니다.
이 모든 사건은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치밀하게 준비하신 계획의 성취였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멀리서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삶 한가운데로 들어오셨습니다.
그래서 성탄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가장 분명한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분이 되셨습니다. 이것이 성탄의 기적이며, 복음의 핵심입니다.
구주로 오신 예수님, 구원의 시작
천사는 예수님의 탄생을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여기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구주’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감동을 주는 인물이나 위대한 스승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오심은 곧 구원의 시작이며, 이것이 성탄이 기쁨의 소식이 되는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첫째로, 우리는 죄와 사망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고, 그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분의 희생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을 받게 되었고,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구원’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거듭난 사람’이라고 불립니다. 이전의 썩어질 생명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이 생명은 단순히 오래 사는 생명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생명이며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 생명은 우리 안에서 빛으로 나타납니다. 성경은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 안에 있던 생명이 우리 안에 들어왔기에, 우리는 어둠 가운데서도 빛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환경이 어렵고 상황이 힘들어도,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은 꺼지지 않습니다.
성탄은 바로 이 생명이 우리에게 주어진 날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그 생명이 지금도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탄의 기쁨이며,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기쁨입니다.
하나님의 의, 그리고 회복된 교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은혜는 생명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두 번째로 주신 은혜는 바로 ‘의’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인간은 누구도 자신의 의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아무리 선하게 살아도, 율법을 지키려 애써도, 하나님의 거룩 앞에서는 모두 부족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셔서 이루신 구원은 우리의 부족함을 덮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우리 안에 심어주신 사건입니다. 죄를 제거하신 자리에 하나님의 의를 넣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담대히 설 수 있게 되었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바라볼 수 없었습니다. 모세조차 하나님의 영광을 온전히 보지 못했고, 그 얼굴에 비친 광채 때문에 사람들은 두려워하며 수건으로 얼굴을 가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다릅니다. 성경은 이제 우리가 수건을 벗고 거울을 보듯 주의 영광을 본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자격이 생겼다는 뜻입니다. 그 자격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주신 의에서 나옵니다. 비록 우리는 여전히 연약하고 실수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실 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덧입은 존재로 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고,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설 수 있습니다.
이 의로 인해 하나님과의 교제가 회복되었습니다. 숨고 도망치던 관계가 아니라, 얼굴을 마주하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구원의 깊은 의미이며, 성탄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놀라운 은혜입니다.
구원은 삶으로 나타난다
구원은 단지 신분의 변화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생명과 의를 주시고, 교제를 회복하신 이유는 그 구원이 우리의 삶을 통해 드러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의 삶에는 반드시 변화의 열매가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억지로 만들어내는 행동이 아니라, 안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의 결과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았다”라는 고백에 머무는 사람이 아니라, “구원을 이루어 가는 삶”을 살아가도록 부름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남겨두신 이유는, 아직 복음을 들어야 할 사람들이 있고, 회복되어야 할 삶의 현장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일상, 가정, 직장, 관계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생명과 빛이 흘러가도록 하신 것입니다.
과거에는 말로 전하는 복음이 강력하게 역사하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광장과 거리, 캠퍼스마다 찬양과 전도가 넘쳤고, 교회로 사람들이 몰려들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시대는 다릅니다. 사람들은 말보다 삶을 봅니다. 논리보다 실제를 보고, 주장보다 열매를 봅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복음은 ‘설명’이 아니라 ‘증거’로 드러납니다. 왜 그렇게 평안한지, 왜 그렇게 기쁨이 있는지, 왜 그렇게 흔들리지 않는지, 사람들은 그 이유를 삶에서 발견합니다. 그리고 묻게 됩니다. “당신은 왜 이렇게 다릅니까?” 그때 우리는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과 빛이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갈 때, 복음은 가장 설득력 있게 전해집니다. 이것이 성탄으로 시작된 구원이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 계속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기쁨의 성탄, 삶으로 드리는 응답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주로 이 땅에 오신 사건은 인류 역사 가운데 가장 위대한 기쁨의 소식입니다. 그분의 오심으로 우리는 거듭났고,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가 되었으며, 하나님의 생명과 의가 우리 안에 심어졌습니다. 성탄은 단지 과거의 한 사건을 기념하는 날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 안에서 살아 역사하는 은혜를 다시 기억하는 날입니다.
오늘 성탄절을 맞아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그 은혜를 다시 바라보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 땅에 오셨는지, 무엇을 우리에게 주셨는지, 그리고 그 은혜가 지금도 우리 안에서 어떻게 역사하고 있는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 기억은 우리를 다시 기쁨으로 이끌고, 감사로 이끌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합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우리 안에서 빛나고 있습니다. 그 빛은 어둠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으며, 우리의 연약함 속에서도 계속해서 역사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어떤 환경 속에서도 소망을 품을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생명과 의는 결코 흔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탄의 은혜는 예배당 안에서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우리의 가정에서, 직장에서, 삶의 모든 자리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말보다 삶으로, 주장보다 열매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드러내는 것이 오늘을 사는 성도의 부르심입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우리 안에 있는 빛을 보게 되고, 그 빛의 근원이 예수 그리스도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오늘 이 성탄의 기쁨이 저와 여러분의 마음과 삶 가운데 충만하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오신 그 은혜를 다시 붙들고, 그 기쁨을 세상 가운데 흘려보내는 성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