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본문

누가복음 7:1~10

1.예수께서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들려 주시기를 마치신 후에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시니라

2.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

3.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 사람을 예수께 보내어 오셔서 그 종을 구해 주시기를 청한지라

4.이에 그들이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이르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5그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하니

6.예수께서 함께 가실새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7.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8.나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병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9.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놀랍게 여겨 돌이키사 따르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10.보내었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보매 종이 이미 나아 있었더라

 

 

말씀 한마디면 충분합니다

다사다난한 시대 속에서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

2025년이 어느덧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참으로 다사다난한 한 해였고, 다가오는 2026년을 기대와 염려가 뒤섞인 마음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특히 최근 급격히 상승한 환율과 하락한 원화 가치는 우리의 일상과 경제 전반에 실제적인 부담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다시 한 번 IMF와 같은 위기가 오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들려옵니다. 1998년 외환위기와 2007~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떠올리며, 지금의 상황을 걱정하는 목소리와 그때와는 다르다는 분석이 엇갈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지금 우리나라의 내수 경제와 전체적인 경제 흐름이 결코 녹록지 않다는 점입니다. 금리는 오르고, 대출 부담은 커지며, 자영업자와 직장인 모두가 삶의 무게를 실감하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 앞에서 걱정과 염려가 드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빚 없는 가정이 드물고, 금리 인상은 곧 생계의 압박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환경이 흔들릴수록, 시장이 요동칠수록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은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입니다. 어떤 조건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며 살아가는 믿음, 그것이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가장 근본적인 힘이 될 것입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요동하지 않고 말씀 위에 서는 믿음이야말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신앙인의 가장 중요한 태도입니다.

기근의 때를 은혜로 건너간 믿음의 사람들

지난주에도 나누었지만, 성경은 어려운 시대를 은혜로 통과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기근의 시대에 그 상황을 원망으로 맞이한 사람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아들인 사람이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엘리야 시대에 수많은 사람이 굶주렸지만, 하나님의 공급을 경험한 사람은 사렙다의 과부였습니다. 또한 이스라엘에는 많은 문둥병자가 있었지만, 고침을 받은 사람은 이방인이었던 수리아 사람 나아만 장군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이야기를 언급하신 이유는 분명합니다.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환경이 아니라 믿음이었습니다. 시대적으로, 현실적으로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인 사람들이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그들에게 기근은 절망의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경제적 불안과 미래에 대한 염려가 커질수록, 우리는 무엇을 붙잡고 살아갈 것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믿음은 단순한 낙관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는 분명한 태도입니다. 말씀을 의지하는 사람은 상황을 부정하지 않지만, 상황 위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오늘 본문은 매우 특별한 장면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성경 전체를 살펴보아도 예수님께서 한 사람의 믿음을 두고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했다”고 칭찬하신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그리고 그 주인공은 다름 아닌 이방인이었던 한 백부장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말씀 한마디면 충분합니다”라는 고백 속에 담긴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이스라엘에서도 보지 못한 믿음, 이방인 백부장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믿음’이라는 단어를 참 많이 사용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단순한 종교적 태도나 지식의 축적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며, 이전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믿음으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백부장은 이러한 점에서 매우 흥미로운 인물입니다. 그는 거듭난 사람도 아니었고, 이스라엘 민족도 아니었으며, 유대 전통 신앙 안에 있던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철저한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이 백부장을 향해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원래라면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을 가장 잘 알고, 신앙의 전통을 이어 온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이런 믿음이 나와야 할 것 같지만, 예수님께서 보시기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방인인 백부장의 믿음이 예수님의 마음을 놀라게 했습니다.

로마 백부장은 로마 군대의 장교로서, 유대 사회에서는 결코 환영받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감시자이자 지배자의 상징이었고, 존경의 대상이 아니라 경계와 반감의 대상이었습니다. 우리 역사로 비유하자면, 일제강점기 시절의 헌병이나 순사를 떠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위치에 있던 사람이었기에, 그의 신앙적 태도는 더욱 놀랍게 다가옵니다.

성경을 살펴보면 흥미롭게도 여러 백부장들이 등장하는데, 그들 대부분이 신앙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가버나움의 백부장 역시 그러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위치와 배경을 넘어, 예수님을 향한 깊은 신뢰와 올바른 믿음의 태도를 보여주었고, 바로 그 점이 예수님의 칭찬을 받게 된 이유였습니다.

 

사랑과 긍휼에서 시작된 믿음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 이 짧은 한 문장은 백부장의 믿음이 어디에서 출발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당시 종은 오늘날의 개념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인격적으로 존중받기보다는 재산처럼 취급되었고, 사고팔 수 있는 존재였습니다. 조선시대 노비처럼 생명과 인권이 보장되지 않은 위치에 있었던 것이 바로 종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종을 향해 “사랑하는 종”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는 단순한 설명이 아니라, 백부장이 그 종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는지를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그는 종을 소모품이 아니라, 사랑과 긍휼의 대상으로 대했습니다. 병들어 죽어가는 종을 방치하지 않고, 어떻게든 살리고자 했던 그의 태도는 이 사람의 인품과 신앙의 뿌리를 보여줍니다.

사랑과 긍휼은 믿음의 출발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회복하신 것도 전적으로 그분의 사랑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그 사랑으로 우리를 부르시고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마찬가지로, 백부장의 믿음도 종을 향한 사랑과 긍휼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병든 자를 고치시고, 고통받는 자를 회복시키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는 그 소문을 흘려듣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종을 살릴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 길을 붙잡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 도움을 요청합니다. 이 믿음은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사랑에서 비롯된 간절한 신뢰였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 질문이 던져집니다. 우리의 믿음은 어디에서 시작되고 있는가. 상황과 필요에서 시작되는 믿음이 아니라, 사랑과 긍휼에서 출발하는 믿음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임을 이 백부장은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신뢰를 행동으로 옮긴 믿음

백부장의 믿음은 마음속에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때, 단순히 “그럴 수도 있겠다” 하고 넘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소문을 신뢰했고, 그 신뢰를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성경은 “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 사람을 예수께 보내어 오셔서 그 종을 구해 주시기를 청하였다”고 기록합니다. 이는 매우 의미 있는 행동이었습니다.

백부장은 로마 군대의 장교였습니다. 자신의 권한으로 직접 예수님을 불러올 수도 있었고, 하급 병사나 종을 보내 부탁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유대 사회에서 신뢰받는 장로들을 찾아가 예수님께 중재를 요청합니다. 이는 예수님에 대한 존중이었고, 동시에 자신의 위치를 내려놓는 겸손한 선택이었습니다.

믿음은 신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참된 믿음은 반드시 행동을 동반합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분명히 알고 있었고, 그분만이 죽어가는 종을 살릴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체면이나 자존심보다 사랑하는 종의 생명을 우선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실천입니다.

유대 장로들이 예수님께 나아가 간절히 구하며 말합니다.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합니다. 그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습니다.” 백부장의 삶은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선한 증거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의 믿음은 말로만 드러난 것이 아니라, 삶의 태도와 행동으로 증명되어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 역시 믿음을 말로 고백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한다고 하면서도, 실제 삶에서는 행동하지 않는 믿음에 머물러 있지는 않은지 점검해야 합니다. 백부장의 모습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해 줍니다. 믿음은 신뢰이며, 신뢰는 결국 행동으로 드러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삶으로 증명된 신앙과 ‘합당함’

유대인의 장로들이 예수님께 나아가 간절히 구하며 말합니다.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합니다.” 그들은 백부장의 신분이나 권세를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의 삶을 증거로 들었습니다. 그는 유대 민족을 사랑했고, 그들의 신앙을 위해 회당을 지어주었습니다. 백부장의 믿음은 개인적인 필요를 넘어 공동체를 향한 사랑과 섬김으로 드러나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합당함’이라는 단어를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합당함은 공로가 아니라 삶의 열매로 드러납니다. 백부장은 로마의 장교로서 지배자의 위치에 있었지만, 유대인들을 억압하기보다 사랑했고, 그들의 신앙을 존중했습니다. 그의 삶은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신뢰를 얻었고, 위기의 순간에 그를 위해 간구하는 증인이 되었습니다.

성경에는 비슷한 장면이 또 등장합니다. 다비다라는 여제자가 병들어 죽었을 때, 사람들은 베드로를 찾아가 간절히 부탁합니다. “이 사람은 우리를 사랑했고, 선행과 구제로 섬긴 사람입니다.” 그 요청 앞에서 베드로는 기도했고, 하나님께서는 다비다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삶으로 드러난 사랑과 섬김이 하나님의 역사 앞에서 증거가 된 것입니다.

백부장의 삶 역시 그러했습니다. 그는 종을 향해서도 사랑과 긍휼을 품었고, 민족과 공동체를 위해 헌신했습니다. 그의 신앙은 개인의 경건에 머물지 않고, 주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으로 흘러갔습니다. 그래서 장로들은 확신을 가지고 예수님께 “이 사람은 합당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 역시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기억되고 있는가. 위기의 순간에 누군가가 우리를 위해 예수님께 나아가 간구할 수 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백부장의 삶은 우리에게 조용하지만 분명한 도전을 던져 줍니다.

 

겸손과 권위를 동시에 아는 믿음

예수님께서 유대 장로들의 요청을 들으시고 백부장의 집으로 향하실 때, 뜻밖의 장면이 이어집니다. 집에 거의 다 이르렀을 즈음, 백부장은 친구들을 보내 이렇게 전합니다.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이는 단순한 겸손의 표현을 넘어, 예수님에 대한 깊은 이해에서 나온 고백이었습니다.

백부장은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로마 군대의 장교로서 권세와 영향력을 지녔고, 유대인들로부터도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을 높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 앞에서 자신을 철저히 낮추며, 그분의 거룩함과 권위를 인정했습니다.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다”는 고백에는 자기 비하가 아니라, 예수님을 향한 경외가 담겨 있었습니다.

이 백부장의 겸손은 예수님의 권위를 분명히 인식하는 데서 나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병사가 있어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옵니다.” 그는 군대 조직 속에서 명령과 권위가 어떤 효력을 가지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명령 한마디가 생사를 좌우하는 세계 속에서 살아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예수님의 말씀 또한 그러한 권위를 가진다는 사실을 이해했습니다. 예수님은 직접 오셔서 손을 대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분의 말씀 한마디면 충분하다고 그는 확신했습니다. 이 믿음은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권위의 원리를 아는 사람의 분명한 신뢰였습니다.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면서도, 예수님의 말씀을 절대적인 능력으로 인정하는 믿음, 이것이 백부장이 보여준 놀라운 신앙의 태도였습니다.

 

“말씀만 하옵소서” — 말씀의 권위를 신뢰한 믿음

백부장의 고백은 단순합니다. “말씀만 하옵소서.” 그는 예수님께서 직접 오시거나 어떤 행위를 하셔야만 일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확신은 분명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자체가 능력이며, 그 말씀은 거리와 상황을 초월해 역사한다는 믿음이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정체성과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정확히 이해한 고백이었습니다.

백부장은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권위의 본질을 배운 사람이었습니다. 군대 조직 안에서 명령은 곧 실행이었고, 말은 곧 현실이 되었습니다. 상관의 한마디에 병사들은 움직였고, 그 명령은 즉각적인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는 이 질서와 원리를 예수님께 그대로 적용했습니다. “나도 권위 아래 있는 사람입니다.” 이 고백은 예수님이야말로 더 큰 권위, 곧 하나님의 권위를 지니신 분이라는 인정이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창조의 능력임을 증언합니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자 빛이 있었습니다. 백부장은 이 진리를 직관적으로 붙잡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른 조건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 무엇을 더 해달라고 요청하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말씀”이면 충분하다고 고백했습니다.

이 믿음은 감정적 기대가 아니라, 말씀의 본질을 아는 사람의 확신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 말씀은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다는 사실을 그는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집과 상황을 내려놓고, 예수님의 말씀 하나에 모든 소망을 맡겼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예수님은 백부장의 믿음을 놀랍게 여기셨습니다. 말씀의 권위를 온전히 신뢰하는 믿음, 그것이 예수님께서 찾으신 믿음이었습니다.

 

말씀을 의지해 살아가는 믿음의 실제

백부장의 믿음은 추상적인 신앙 고백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는 “말씀만 하옵소서”라는 고백을 삶의 원리로 알고 있었습니다. 성경은 이미 여러 장면을 통해 말씀을 의지하는 믿음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 보여줍니다. 베드로 역시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상황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의 경험과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명령이었습니다. 고기는 밤에 잡는 것이 상식이었고, 이미 실패한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던지겠습니다.” 그 말씀에 순종했을 때, 그물은 찢어질 정도로 고기로 가득 차게 됩니다. 상황은 변하지 않았지만, 말씀을 붙잡은 순간 결과가 달라졌습니다.

백부장의 믿음도 동일합니다. 그는 자신의 생각과 계산을 앞세우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현실을 바꾼다는 사실을 신뢰했습니다. 그래서 “말씀만 하시면 됩니다”라고 담대히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말씀은 단순한 조언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고 상황을 전환시키는 능력입니다.

오늘 우리 역시 삶의 수많은 자리에서 선택 앞에 서게 됩니다. 경험을 따를 것인가, 말씀을 따를 것인가. 현실의 조건을 볼 것인가,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을 것인가. 믿음이란 이 질문 앞에서 말씀을 선택하는 태도입니다. 백부장의 믿음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해 줍니다. 말씀이 기준이 될 때, 그 말씀이 우리의 삶을 책임지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가는 믿음

성경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을 “새로운 피조물”이라 말합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고, 보라 새 것이 되었다고 선포합니다. 이는 단순히 종교적 신분이 바뀌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삶의 기준과 동력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뜻입니다. 옛 사람은 자신의 경험과 판단, 감정과 계산을 중심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의 능력을 의지해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백부장의 태도는 이러한 새 사람의 믿음을 미리 보여주는 모습과도 같습니다. 그는 자신의 지위와 권세, 환경적 유리함을 내려놓았습니다. 대신 예수님의 권위와 말씀의 능력을 전적으로 인정했습니다.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라는 고백은 자신을 비하하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을 높이는 신앙의 고백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그리스도인의 삶은 ‘내가 주도하는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이끄시는 삶’입니다. 나의 생각이 아니라 말씀을 따르고, 나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삶입니다.

백부장은 이 원리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말하지 않았고,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실 수 있는지를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한계를 고백하면서도,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이 믿음이 바로 예수님께서 놀라워하신 믿음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역시 새 사람으로 부름받은 존재로서, 어떤 기준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다시 한번 점검해 보아야 할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놀라워하신 믿음

백부장의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놀라움을 감추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은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놀랍게 여겨”라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따르는 무리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다.” 이는 예수님께서 한 사람의 믿음을 공개적으로 칭찬하신 매우 이례적인 장면입니다.

더 놀라운 점은 이 믿음을 가진 사람이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율법을 배워온 유대인도 아니었고, 성전 중심의 신앙 전통 안에 있던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로마의 군인이었고,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보여주셨습니다. 믿음은 혈통이나 배경이 아니라, 누구를 신뢰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사실입니다.

백부장의 믿음은 예수님의 정체성을 정확히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단순한 치유자로 보지 않았습니다. 말씀으로 생명과 현실을 다스리시는 분, 하나님의 권위를 지니신 분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무 조건 없이 말씀을 신뢰했습니다. 그 신뢰가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결국,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보았을 때 그 종은 이미 나아 있었습니다. 어떤 특별한 의식이나 과정 없이,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로 병은 떠났고 생명은 회복되었습니다. 믿음의 고백이 있었던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의 역사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이 장면은 오늘 우리에게도 묻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믿고 있는가. 필요를 채워주는 분으로만 믿는지, 아니면 말씀으로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주님으로 신뢰하고 있는지. 예수님께서 놀라워하신 믿음은 바로 이 지점에서 드러납니다.

 

말씀 한마디면 충분합니다 — 2026년을 향한 믿음의 결단

오늘 본문은 결국 우리에게 하나의 분명한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무엇을 붙잡고 살아가고 있는가.” 백부장은 거듭난 사람은 아니었지만,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를 정확히 보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지위와 환경, 경험과 계산을 내려놓고 예수님의 권위와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말씀 한마디면 충분합니다”라는 고백으로 집약되었습니다.

그 결과는 분명했습니다.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보았을 때, 종은 이미 나아 있었습니다. 말씀을 하신 그 순간, 하나님의 역사는 이미 완성되고 있었습니다. 백부장은 결과를 보기 전에 말씀을 믿었고, 그 믿음은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 안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있고, 사랑과 긍휼이 부어져 있으며, 말씀을 믿을 수 있는 믿음 또한 이미 주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백부장보다 더 분명한 근거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십자가와 부활, 복음의 완성을 아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다가오는 2026년을 맞이하며 다시 한번 결단해야 합니다. 경제적 불안과 미래에 대한 염려 속에서 내 생각과 경험을 붙잡을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을 것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새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상황이 아니라 말씀을 기준으로 사는 것입니다.

오늘 백부장의 믿음을 묵상하며, 우리 역시 고백하기를 원합니다. “주님, 말씀 한마디면 충분합니다.” 그 말씀을 신뢰하며 한 해를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가운데 구원과 회복, 그리고 선한 열매를 이루실 줄 믿습니다. 이 믿음의 자리로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